대동강 팔아치운 희대의 사기꾼, 김선달의 진짜 정체
[이준목 기자]
봉이 김선달(金先達)은 조선 말기에 희대의 사기꾼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비상한 두뇌와 번뜩이는 기지를 지닌 김선달은 항상 온갖 잔꾀로 사람들을 현혹하여 막대한 재물을 끌어모았다고 한다. 특히 평양에서 주인이 없는 공공재인 대동강 물까지 팔아버린 일화는 가장 유명하다.
김선달의 진짜 정체는 무엇일까. 과연 그는 어떤 예측불허의 기발한 수법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속일수 있었을까. 그리고 일개 사기꾼에 불과한 김선달의 이야기는 왜 오늘날까지 그토록 유명해진 것일까. 9월 25일 방송된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에서는 '조선 최고 잔꾀의 달인, 김선달은 어떻게 대동강 물을 팔았나'편을 통하여 김선달의 실체로 돌아본 당시의 사회상을 조명했다.
▲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관련 이미지. |
ⓒ tvN |
봉이(鳳伊)는 김선달의 별명으로 닭을 봉황으로 만든 사기 일화에서 비롯됐다. 김선달은 한 닭장수에게 닭을 봉으로 착각하는 듯 바보짓을 하며 속여서 일부러 비싼 값에 구매했다. 그리고 그 고을의 사또를 찾아가 닭을 귀한 봉황이라고 우기며 갖다 바쳤다. 황당해진 사또는 처음엔 김선달의 볼기를 때렸으나 그의 하소연을 듣고나서는, 김선달이 순진하여 속아 넘어갔다고 판단하고 닭장수를 잡아 들였다.
졸지에 날벼락을 맞게 된 닭장수는 김선달에게 받은 돈을 돌려주며 사태를 무마하려고 했다. 하지만 김선달은 원래 구매한 실제 가격보다 값을 훨씬 부풀리는가 하면, 볼기를 맞은 배상금까지 더하여 닭장수에게 거액의 돈을 뜯어냈다. 대담하고 기발한 사기극으로 사또와 닭장수를 모두 속인 김선달은 이후 봉이라는 별명을 얻게된 것이다. 판본에 따라서 이 일화는 평소 상습적으로 바가지를 씌우는 나쁜 닭장수를 응징하는 내용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김선달이 과거 시험도 속임수로 합격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김선달은 심각한 독감에 걸린 척 일부러 두꺼운 옷을 잔뜩 챙겨입고, 시험장에 가서는 쉴틈없이 기침을 해댔다. 감독관은 혹시 전염병이 옮을까 두려워 김선달을 멀리 떨어진 시험장 한 구석으로 보냈다.
당시 김선달이 응시한 시험은 강경(講經)으로, 필기 시험이 아니라 경학의 글자와 문장 해석을 문답으로 주고받는 구두 시험이었다.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던 시험관은 김선달의 답변을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차마 가까이 부르지는 못하고 중얼중얼 유창하게 무언가를 암송하는 모습만 보고 지레 합격을 선언하고 만다. 과거제도의 허점까지 교묘하게 이용하는 김선달의 재치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과거에 합격한 김선달이 이후 관직에서 활동했다는 내용의 일화는 전해지지 않는다. 김선달이 활동한 시기는 조선 후기로서 사회 시스템이 무너지고 부정부패가 만연하여, 급제자에 비하여 관직수가 적어 뇌물없이는 관직을 받기 어려울 정도였다.
당시 조선 곳곳에서는 영덕의 방학중(지능범죄), 경주의 정만서(무전취식범), 제주의 변인태(상사에 하극상을 벌인 군졸), 김제의 정평구(사기꾼) 등 김선달처럼 사람들을 기만하거나 사회질서를 흔들며 자신의 잇속을 채우는 인물들이 넘쳐났다. 그리고 이런 이들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탄생한 단어가 바로 건달(乾達)이다.
▲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관련 이미지. |
ⓒ tvN |
김선달은 여러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일부러 팥죽에 식초를 듬뿍 뿌리게 해서 주문하고는 직접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의아하게 바라보는 사람들 앞에서 평양에서는 이것이 당연한 유행인 것처럼 능청스럽게 둘러댄다. 외지에서 온 사람들은 시골에서 왔다가 무시 당할까봐 너나 할 것 없이 식초를 넣은 팥죽을 주문했다.
시큼한 식초맛 때문에 사람들은 팥죽이 쉬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고 오히려 더 비싼 팥죽값까지 지불했다. 쉰 팥죽은 그날 완판됐다. 평양이라는 대도시의 위상과, 남에게 보여지는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들의 심리까지 치밀하게 이용할 줄아는 김선달의 영악함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드물지만 김선달이 역으로 골탕을 먹을뻔 했던 일화도 몇몇 존재한다. <한국구비문학대계>에 따르면 어느새 김선달의 명성이 조선 팔도에 알려지면서 한양에서 한 여인이 호기심을 느끼고 찾아온다. 여인이 마음에 든 김선달은 함께 가짜 부부 행세를 하기로 모의하고 한 부잣집에서 신세를 지게 된다. 그러나 다음날 여인은 김선달을 남겨두고 밤새 부잣집에서 재물을 훔쳐서 혼자 달아난다. 여인은 김선달의 유명세를 듣고 일부러 곤경에 빠뜨리기 위하여 접근했던 것이다.
졸지에 독박을 쓰게 된 김선달은 잠시 궁지에 몰렸으나, 임기응변으로 부잣집 주인이 자신의 아내를 훔쳐갔다며 오히려 역공을 가한다. 세간의 이목에 난처해진 주인은 결국 김선달을 달래기 위하여 돈까지 쥐어주며 내보내야했다.
무사히 집밖을 나선 김선달에게 도망간 줄 알았던 한양 여인이 다시 나타난다. 하지만 김선달은 화를 내기는 커녕 "돈벌이 할 일이 또 있으면 내게 맡기시오. 내 돈벌이좀 할테니"라고 호탕하게 웃으며 여인에게 어떤 복수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선달의 일화 중에서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는 역시 대동강 물을 팔아치운 일화가 꼽힌다. 한양의 한 부자를 찾아간 김선달은 집안에 큰 돈이 필요하여 자신이 주인인 대동강을 팔겠다고 제안한다. 당시 평양은 마땅한 우물이 없어서 생활용수를 대부분 대동강에서 길어나르고 있었다. 김선달은 부자를 대동강으로 데려갔고, 강으로 물을 길러 온 물장수들로부터 '물세' 명목으로 돈을 한푼씩 받는 모습을 보여줬다.
반신반의하던 한양 부자는 이제 김선달의 말을 완전히 믿게 되었고, 엄청난 거액을 지불하고 김선달로부터 대동강을 완전히 구매했다. 하지만 사실 김선달은 미리 물장수들을 포섭하여 돈을 주고 자신이 돌아왔을 때 한푼씩 되돌려달라고 약속했던 것이다. 뒤늦게 김선달에게 속았다는 것을 깨닫고 땅을 치며 후회했지만 김선달은 이미 유유히 사라진 뒤였다.
김선달의 일화들을 살펴보면 사기의 주요 대상은 수도 한양 출신이거나 양반-부자들이 많다. 설화에서 주인공의 속임수가 통쾌하려면 힘없는 서민이거나 약자보다는 막강한 '권력자'를 골탕먹일 때 그 진가를 발휘한다. 여기에는 조선 시대 내내 평안도에 대한 지역 차별로 소외당했던 지역민들의 한양 주류 사회에 대한 반발심도, 김선달을 통한 대리만족으로 작용했다는 평가다.
그렇다면 과연 김선달이라는 인물의 진짜 정체는 무엇일까. 오늘날에는 김선달이 실존인물이 아니라 구전설화 속 '허구의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실제 존재했던 여러 사람들의 에피소드가 설화를 통하여 전승되는 과정에서, 봉이 김선달이라는 하나의 캐릭터로 모아졌다는 것이다.
김선달의 이야기가 본격적인 기록으로 등장하는 것은 대한제국 말기인 1906년 <황성신문>에서 연재된 작자 미상의 한문소설인 '신단공안'을 통해서다. 여기서 45화에 걸쳐 김선달의 이야기가 소개되면서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다. 유일하게 김선달의 본명이 '김인홍'이라고 기재한 것도 신단공안이 유일하지만, 다른 문헌에는 존재하지않는다. 신단공안을 시작으로 김선달 설화는 수많은 작품들이 쏟아져나오며 남녀노소 모르는 사람들이 없는 유명한 이야기가 됐다.
그런데 남들을 골탕먹이는 김선달의 일화가 이렇게 오랜 기간 알려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김선달은 영웅이나 정의로운 인물라기보다는 그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속물에 가깝다. 하지만 전통적인 사회질서가 무너지고 조선 말기에 접어들면서, 김선달이라는 인물은 정공법이 아닌 특유의 잔꾀와 처세로 기득권을 농락하는 반항의 아이콘이자, 시대를 앞서간 안티 히어로(反영웅)에 가까운 캐릭터로 오히려 대중의 공감을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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