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필의 視線] 천안 향토사학자 임명순과의 인연
조한필 2024. 9. 26.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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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지낸 20여 년간 가끔씩 천안향토사 신자료 발굴로 놀라게 하는 선배가 있다.
고교 10년 위인 임명순이다.
임 선배와는 20여년 전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됐다.
2014년 복간된 '천안향토연구' 편집업무도 10년 넘게 함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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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지낸 20여 년간 가끔씩 천안향토사 신자료 발굴로 놀라게 하는 선배가 있다. 고교 10년 위인 임명순이다.
그는 유관순 열사 관련 신자료 발굴로 유명하다. 27일 백석대 유관순연구소 학술대회서 독특한 글을 발표한다. 제목은 ‘광복 후의 유관순 열사의 부활’ 이다. 유 열사는 1947년 순국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1940년 말부터 1950년대 걸쳐 선양작업이 대대적 일어났다. 그의 주장은 이런 유 열사 선양작업이 4·19혁명 고교생 참여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그 한 증거로 4·19 직후인 1960년 5월 4일자 동아일보 석간 3면 기사를 들었다. 당시 집권당이 된 민주당의 주요한(시인) 정책위원장의 UPI통신 기고문이 실렸다. 그 내용 중 이런 부분이 있다.
“여러나라의 그리고 여러 시대의 학생들이 정치적 변혁에 의의 깊은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고교생들이 혁명의 불꽃을 튀겨놓은 것은 아마도 오직 한국의 경우가 있을 뿐이다. 이 한국의 십대 소년들은 정치적 변혁의 문제에 있어 훌륭한 전통을 가지고 있다. 1919년의 독립만세 운동시에 희생된 여고생 유관순양은 한국의 쟌 다르크로 불리어지고 있다….”
혁명주체세력으로 볼 수 있는 주요한이 한국의 고교생 혁명 참여 기원을 유 열사에게 찾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신문자료를 찾아낸 임 선배가 대단하고 놀랍다. 70대 중반을 넘긴 나이에 컴퓨터 앞에 앉아 오랜 공을 들여 찾아낸 것이다.
임 선배와는 20여년 전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됐다. 중앙일보 주재기자로 내려온 지 얼마 안 될 때다. 그가 사라지는 천안의 상징 능수버들 확대·보급운동을 펴고 있어 취재했다. 당시 현 천안시 동남구청 앞(옛 시청 뒤) 버들육거리 능수버들 앞에서 만났다. 기사를 찾아보니 2001년 2월의 일이었다.
나무에 대해 너무 박식한 지식을 갖고 있어 전공을 물었다. 서울대 농대를 나왔다. 궁금증이 중·고교까지 갔다. 천안토박이지만 대전중·대전고를 나와 중·고교 선배임을 이렇게 알게 됐다. 최근 또다른 궁금증을 풀었다. 그의 지적 능력이면 최고 명문 경기중학교도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왜 1960년 서울로 안 가고 대전으로 진학했냐”고 물었다. 재미있는 대답이 돌아왔다. 갑자기 나라에서 충남 학생은 충남의 중·고교만 가도록 했기 때문이란다. 당시 대전은 충남에 속했었다. 제멋대로식 문교행정 덕분에 그를 선배로 모시게 것이다.
중앙일보 시절, 임 선배 덕을 많이 봤다. 그가 유 열사 관련 새 사실을 밝혀낼 때마다 단독기사를 낼 수 있었다. 유 열사 탄생연도가 1904년이 아니라 1902년이라는 사실, 또 항소심 판결문을 찾아내 최종형량이 징역 3년형임을 밝혔다. 유 열사가 대법원 상고를 하지 않은 것도 그가 알아냈다.
그와는 지금도 가끔 만나 답사도 다니고 향토사 관련 이야기를 나눈다. 2014년 복간된 ‘천안향토연구’ 편집업무도 10년 넘게 함께 하고 있다. 필자가 학술등재지에 ‘유관순 발굴 과정의 검토’ (백산학보 113집, 2019년), ‘1947년 아우내 만세운동기념비 건립의 역사적 의의’ (역사와 담론 104집, 2022년)를 발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의 도움이 있다. 항상 놀라움을 주는 선배가 요즘 건강을 되찾아 너무 다행이다.
그는 유관순 열사 관련 신자료 발굴로 유명하다. 27일 백석대 유관순연구소 학술대회서 독특한 글을 발표한다. 제목은 ‘광복 후의 유관순 열사의 부활’ 이다. 유 열사는 1947년 순국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1940년 말부터 1950년대 걸쳐 선양작업이 대대적 일어났다. 그의 주장은 이런 유 열사 선양작업이 4·19혁명 고교생 참여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그 한 증거로 4·19 직후인 1960년 5월 4일자 동아일보 석간 3면 기사를 들었다. 당시 집권당이 된 민주당의 주요한(시인) 정책위원장의 UPI통신 기고문이 실렸다. 그 내용 중 이런 부분이 있다.
“여러나라의 그리고 여러 시대의 학생들이 정치적 변혁에 의의 깊은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고교생들이 혁명의 불꽃을 튀겨놓은 것은 아마도 오직 한국의 경우가 있을 뿐이다. 이 한국의 십대 소년들은 정치적 변혁의 문제에 있어 훌륭한 전통을 가지고 있다. 1919년의 독립만세 운동시에 희생된 여고생 유관순양은 한국의 쟌 다르크로 불리어지고 있다….”
혁명주체세력으로 볼 수 있는 주요한이 한국의 고교생 혁명 참여 기원을 유 열사에게 찾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신문자료를 찾아낸 임 선배가 대단하고 놀랍다. 70대 중반을 넘긴 나이에 컴퓨터 앞에 앉아 오랜 공을 들여 찾아낸 것이다.
임 선배와는 20여년 전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됐다. 중앙일보 주재기자로 내려온 지 얼마 안 될 때다. 그가 사라지는 천안의 상징 능수버들 확대·보급운동을 펴고 있어 취재했다. 당시 현 천안시 동남구청 앞(옛 시청 뒤) 버들육거리 능수버들 앞에서 만났다. 기사를 찾아보니 2001년 2월의 일이었다.
나무에 대해 너무 박식한 지식을 갖고 있어 전공을 물었다. 서울대 농대를 나왔다. 궁금증이 중·고교까지 갔다. 천안토박이지만 대전중·대전고를 나와 중·고교 선배임을 이렇게 알게 됐다. 최근 또다른 궁금증을 풀었다. 그의 지적 능력이면 최고 명문 경기중학교도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왜 1960년 서울로 안 가고 대전으로 진학했냐”고 물었다. 재미있는 대답이 돌아왔다. 갑자기 나라에서 충남 학생은 충남의 중·고교만 가도록 했기 때문이란다. 당시 대전은 충남에 속했었다. 제멋대로식 문교행정 덕분에 그를 선배로 모시게 것이다.
중앙일보 시절, 임 선배 덕을 많이 봤다. 그가 유 열사 관련 새 사실을 밝혀낼 때마다 단독기사를 낼 수 있었다. 유 열사 탄생연도가 1904년이 아니라 1902년이라는 사실, 또 항소심 판결문을 찾아내 최종형량이 징역 3년형임을 밝혔다. 유 열사가 대법원 상고를 하지 않은 것도 그가 알아냈다.
그와는 지금도 가끔 만나 답사도 다니고 향토사 관련 이야기를 나눈다. 2014년 복간된 ‘천안향토연구’ 편집업무도 10년 넘게 함께 하고 있다. 필자가 학술등재지에 ‘유관순 발굴 과정의 검토’ (백산학보 113집, 2019년), ‘1947년 아우내 만세운동기념비 건립의 역사적 의의’ (역사와 담론 104집, 2022년)를 발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의 도움이 있다. 항상 놀라움을 주는 선배가 요즘 건강을 되찾아 너무 다행이다.
/천안·아산 선임기자
조한필 기자 chohp11@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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