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에 욕하고 19금 웹소설 읽고... 멋진 '사모님'의 등장
[이진민 기자]
한국 드라마에서 '사모님'만큼 가부장적인 캐릭터가 있을까. 그들은 항상 남편에게 높임말을 쓴다. 반대로 남편은 반말하거나 아랫사람처럼 하대한다. 또한 허영심이 많고 무지한 캐릭터로 연출되는데 이는 되려 남성의 재력과 능력을 체감하게 한다. 드라마 <작은 아씨들> 속 정치인 남편을 착실히 보필한 상아는 "멍청해 보일수록 남편은 똑똑해 보이고, 사치할수록 남편의 성공이 실감 난다"고 하기도 했다.
남성의 힘을 증명하기 위한 사모님들은 아름답지만, 캐릭터로서 납작했다. 순종적인 말투와 고분고분한 표정, 묘하게 바보 같은 행동. 그 속에선 여성 캐릭터를 무력화하는 가부장제의 섬뜩함만이 보였다.
그리고 어느 사모님이 모든 걸 박살 냈다. 삐딱한 말투와 노골적인 욕망, 남편과 아들을 탓하는 속내까지. 누군가의 트로피는 되기 싫고, 내가 가진 트로피는 늘리고 싶은 사모님의 욕망에 휘둘리고 싶다.
▲ '손해 보기 싫어서' 속 한 장면 |
ⓒ tvN |
실체는 집안에서 나온다. 그는 남편에게 반말, 정확히는 공격적인 말투를 쓴다.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한 남편이 아들을 훈계하자 "가정에나 충실하라"며 일갈하고(1화), "당신의 행동은 외도가 아닌 오입질"이라고 노골적으로 표현한다(4화). 또한 회사로 혼외 자식을 들인 남편이 변명하자 "닥치라"는 비속어를 뱉는다(9화). 분노를 참지 못해 남편이 가꾼 정원을 부수고 "네가 키운 것들은 싹을 자를 거라"고 협박하는 정아의 행동은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기본값인 여타 사모님 캐릭터에서 볼 수 없는 모습이다.
비수 같은 말투는 아들에게도 향했다. 그는 아들에게 "회사 물려받고 싶으면 조심히 하라"며 "이 부를 갖고도 남자를 잘못 들여 '박복한 X' 소리를 들었는데 자식 복도 없다는 소리 듣기 싫다"고 경고한다(3화). 또 남편의 모습을 투영해 "부도덕하고 무책임하고 충동적인 모습을 보이지 말라"고 충고하거나(3화) "사생활은 복기호 아들답게 깔끔하게 해결하라"며 죄책감을 덧씌우기도 한다(4화).
남편에겐 엄격한 책망을, 아들에겐 부채 의식을 따지는 정아는 자신이 느끼는 욕망을 숨기지 않고 표출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남편도, 아들도 상아의 욕망 앞에서 절절맨다. 남편은 아내가 화낼 때마다 입을 닫고 고개를 숙이며, 아들은 '미혼 여자를 근처에 두지 말라'는 엄마의 말을 착실히 따른다.
정아의 욕망은 관계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여자' 선정아의 욕망은 더하다. 실내 정원에 앉아 고상하게 태블릿 PC를 들고 있는 정아. 남들이 보면 고전소설을 읽는 줄 알겠지만, 실상은 아찔한 19금 로맨스물이다. 그는 19금 웹소설의 열렬한 구독자다. 회차마다 작가를 응원하는 댓글을 달고, 오디오 드라마로 제작한다는 소식에 직접 투자비까지 댔다. 이토록 성적 욕망에 충실했던 사모님이 있었던가. 그 욕망은 남편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닌 철저히 자신만을 향했다는 점에서 변혁적이다.
▲ '손해 보기 싫어서' 속 한 장면 |
ⓒ tvN |
또한 술을 못 하는 남편과 달리 술자리에서 호탕하게 직원들과 어울리며 묘한 분위기를 감지하거나(7화), 혼외 자식이 회사 신입으로 들어왔다는 말에 "그의 아내를 이용하라. 어차피 휘두를 칼이라면 정을 붙이지 말라"고 아들에게 냉철히 조언한다(9화). 남편이 불륜에 흔들리고, 아들이 인정(人情)에 흔들릴 때, 선정아만은 침착하고 서늘하게 자신만의 판을 깐다.
꿀비 일가에서 가장 이성적이며 동시에 서슴없이 분노를 표출하는 인물은 정아다. 곧이곧대로 사모님에 투영된 가부장적 욕망을 흡수하지 않고, 정아는 자신만의 '사모님'을 조각했다. 남편에게 비속어를 던지고 19금 웹소설을 즐겨 읽는 정아는 한국 드라마가 기혼 여성을 변주하는 낡은 방식에 신선한 찬물을 끼얹었다.
회장도, 사장도 꼼짝 못 하지만, 그렇다고 실질적인 권좌에 오르지는 않는다. 아무리 선정아라도 완전히 사모님에서 벗어날 수는 없어서일까. 아니면 숨겨진 계획이 있는 걸까. 아직은 정아의 큰 그림은 스케치 단계지만, 새로운 사모님의 형식을 그리고 있기에 그가 등장할 때마다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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