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의 새로운 얼굴, 괴짜 탐정 '셜록'이 해낸 것
[김성호 기자]
영국을 대표하는 방송국 < BBC >는 드라마 명가로도 유명하다. 그 명성을 쌓아 올린 건 1963년부터 현재까지 전무후무한 인기를 자랑하는 롱런 드라마 <닥터 후> 덕분이겠으나, 외에도 명작 소리를 듣는 드라마를 꾸준히 제작해 영국 드라마 시장을 선도해 온 노력을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영국 드라마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모르긴 몰라도 영국이 쌓아 올린 문화적 자산, 윌리엄 셰익스피어 이후 이어져 온 문학 중심의 창조적 유산들이 제 역할을 해내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이는 없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닥터 후>를 보자. 매 시즌 허물을 벗듯 그 틀과 내실을 재창조하는 단막극 형식의 SF 물이지만, 시리즈 가운데 적잖은 회차에서 <닥터 후>를 넘어선 이야기를 빌려오곤 한다.
<농부 피어스의 환상>에서 기원한 로빈 후드의 설화라거나, 윌리엄 셰익스피어, 애거사 크리스티, 찰스 디킨스 같은 영국을 대표하는 문인을 등장시키는 대목은 영국이 저들이 가진 자산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를 단적으로 내보인다. 그저 영국 출신 유명인을 활용할 뿐이 아니다. 그들이 남긴 자산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에피소드, 줄거리, 캐릭터도 얼마든지 있다. 심지어는 옛 작품을 새로이 단장하여 오늘의 감수성에 맞게 내어놓기도 하는 것이다.
▲ 셜록 스틸컷 |
ⓒ BBC |
수많은 유명 탐정, 이를테면 포와로나 말로, 마플, 뒤팽 같은 이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중 누구도 셜록과 겨룰 정도가 못 된다. 천재적 분석력을 지닌 셜록은 존 왓슨이란 매력적 동료, 또 짐 모리아티와 같은 숙적과 함께 그대로 전설이 되었다. 괴짜 같으면서도 어딘지 정이 가고, 걸출한 역량이 있으면서도 내면의 약함과 힘겹게 맞서 싸우는 끝을 알 수 없는 사내. 셜록의 이야기가 한 세기가 훌쩍 넘도록 생명력을 유지하는 이유가 바로 캐릭터에 있다.
< BBC >가 2010년 <셜록>을 다시 제작하기로 한 건 <닥터 후> 외에 시청률을 지탱할 또 다른 프로젝트가 간절했던 영향이 있었다. 최고의 닥터 중 하나로 꼽히는 10대 닥터 배우 데이비드 테넌트가 2009년 하차를 결정하며 무명이던 맷 스미스를 11대 닥터로 낙점한 건 결정적이었다. 캐릭터를 완전히 뒤집는 과정에서 시청률이 흔들릴 수 있다는 불안 아래 안정적으로 시청률을 확보할 대형 프로젝트를 준비하게 된 것이다. 메인작가가 되기 전까지 <닥터 후> 시리즈의 여러 인상적인 에피소드를 집필했던 스티브 모팻이 <셜록> 호의 총책임자가 됐고, 내친김에 첫 시즌 첫 에피소드인 '분홍색 연구'까지 집필했다.
시청자를 매료시키기까지, 단 3편
<셜록> 첫 시리즈는 1시간 30분 내외, 짤막한 영화 분량의 에피소드 세 편으로 꾸려졌다. 단막극처럼 회마다 새로운 사건을 다루지만 인물들은 각자의 사연과 감정을 이어가는 식이다. 할리우드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영국을 넘어 세계적 인지도까지 확보한 베네딕트 컴버배치를 셜록으로, 마틴 프리먼을 왓슨으로 기용하는 초강수도 뒀다. 남은 건 낡은 셜록을 오늘의 감성으로 되살릴 실력뿐인 것이다.
모팻은 오늘의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백수십 년 전의 명탐정 셜록 홈즈를 되살려낸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경찰이 해결하지 못하는 사건을 대신 풀어내는 자문탐정 셜록이다. 그가 이라크전에 군의관으로 참전한 뒤 부상을 입고 돌아온 존 왓슨과 함께 살며 사건을 풀어가는 과정을 이 시대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의 솜씨로써 능란하게 펼쳐낸다.
첫 사건은 독약을 먹고 죽은 피해자들이다. 하나같이 음독자살한 모습이지만 셜록은 독보적인 분석력을 활용하여 연쇄살인이란 사실을 알아낸다. 남은 건 방법, 범인의 성격을 유추한 뒤 함정을 파 그를 유인하는 방법이 착착 맞아 든다. 존의 눈에 셜록은 하나부터 열까지 예측할 수 없는 이다. 처음엔 흥미이던 것이 나중엔 은근한 마음이 쓰이는 감정적 관계로 발전한다. 첫 사건이 둘의 관계가 움트는 씨앗이 된다.
▲ 셜록 스틸컷 |
ⓒ BBC |
시대를 현재로 바꾼 점은 충분한 효과를 발휘한다. 셜록이 스마트폰을 들거나 컴퓨터를 통해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은 지난 시간 그가 어떻게 동시대 사람들을 매혹했는지 더욱 효과적으로 알도록 한다. 그가 나와 같은 시대에 살아 움직인다는 사실이 그가 어떤 인간인지를 보다 생생히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베네딕트 컴버배치와 마틴 프리먼은 마블 시리즈의 닥터 스트레인지와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호빗 사이에 결코 흐르지 않을 듯 보였던 감정의 통로를 열어 젖힌다. 둘의 뛰어난 연기력은 검증된 세기의 콤비에 생동감을 불어넣기 충분하다. 연출 또한 매끄러워서 작품을 본 이는 누구든 <셜록>의 다음 시리즈, 나아가 < BBC >가 제작하는 일군의 드라마에 기대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 셜록 포스터 |
ⓒ BBC |
각 1시간 30분 내외의 러닝타임, 또 출연한 두 배우의 무게감을 볼 때 드라마라기보다는 각 에피소드가 한 편의 영화처럼 느껴지는 구성이지만, 빠른 템포로 이어가는 시리즈물로서의 파급력이 보다 크리란 계산이 그야말로 적중했다. <셜록>은 전 세계 드라마 애호가들 사이에서 모르는 이 없는 작품이 되었다. 또 < BBC >는 목표한 그대로 <닥터 후>가 부진한 시간 동안 간판으로 내세울 만한 시리즈를 얻게 되었다.
가이 리치의 영화 시리즈를 비롯해 소설로 확고히 자리매김해 있던 셜록 홈즈와 존 왓슨, 짐 모리아티를 그대로 등장시키면서도 이들의 이미지를 온전히 새로 써내는 데 성공했다는 점은 < BBC >의 기획이 얼마나 적절했는지를 확인하게 한다.
에피소드당 평균 시청자 수가 740만 명 가량을 기록했고, 그 인기를 바탕으로 곧장 영국을 넘어 전 유럽, 아시아에서까지 폭발적 흥행을 이어갔다. 오늘에 이르러 셜록 홈즈 팬덤이라 하면 모두가 가이 리치의 영화 속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아니라 베네딕트 컴버배치를 떠올리니, 영국 대표 방송사가 영국 대표 캐릭터의 주연을 미국인이 아닌 영국인으로 돌려놓은 작업이 성공했다 봐도 좋겠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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