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젊은 작가 감시 명령의 배후... 혼란에 빠진 남자

김상목 2024. 9. 26.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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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타인의 삶>

[김상목 기자]

 영화 <타인의 삶> 스틸 이미지
ⓒ ㈜트리플픽쳐스
수많은 첩보물 배경이 된 냉전 당시, 동구 사회주의권을 대표하는 최고 정보기관은 당연히 소련 KGB였다. 하지만 다음 서열을 대라면 다들 아리송해질 것이다. 해당 분야에 조예가 있는 이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답할 수 있다. 동독 '국가안전부', 속칭 '슈타지' 기관이다. 무자비한 암살과 테러 등 파괴 활동이 연상되는 타 기관과 달리 슈타지는 상대적으로 무색무취한 인상을 지녔지만, 그 정보 능력은 KGB에서 파트너로 존중할 만큼 대단했다.

특히 슈타지는 자국민 통제와 서독을 대상으로 한 기밀 획득 및 정보 교란에서 항상 판정승을 거둘 정도로 실력을 자랑했다. 비결은 인구 대비 세계 최대 규모의 요원과 정보원 비율에서 찾을 수 있다. 1600만 명 남짓했던 동독 인구 중 비밀경찰은 10만 명, 정보원은 20만 명에 달했다. 인구 50여 명당 1명꼴로 슈타지와 관련된 셈이다. 이 비율을 능가한 건 북한이 유일했다. 대다수 시민은 통일 이후에 자신이 감시당해 왔다는 걸 파악할 수 있었다.

마치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현실에 구현한 것처럼 보이던 슈타지의 감시는 통일 이후 여러 미디어의 소재가 됐다. 그런 사례 중에도 가장 완성에 가까운 작품은 역시 2006년 영화 <타인의 삶>일 것이다. 국내 개봉 후 17년 만에 재회하게 된 이 영화 속 동독의 음침한 그림자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 어떤 함의를 제시할 수 있을까?

최정예 도청전문요원, 딜레마에 빠지다

장소는 독일 경찰학교. 정보요원 지망생을 대상으로 한 특강이 한창 진행 중이다. 현직 정보요원이 자신의 현장 사례를 차분하지만 긴장 가득한 가운데 강의한다. 그는 이웃의 서독 탈출을 조력한 것으로 의심받는 용의자 심문 경험을 학생들에게 풀어낸다.

그는 절대 고함을 지르거나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대신에 엄청난 인내심을 갖고 심리적으로 거미줄에 걸린 벌레를 옥죄듯 차근차근 밀어붙인다. 똑같은 질문을 40시간째 거듭 되풀이하는 심문 방식에 학생이 인권 침해가 아니냐 묻자, 그는 결백하면 화를 내며 격앙될 테고, 죄가 있다면 미리 준비한 각본대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앵무새처럼 반복할 것이라 경험담을 전수한다.

강사는 취조실에서 특이한 버릇이 있다. 심문당하는 용의자를 의자에 앉힌 후 손바닥을 엉덩이 밑에 깔게 하는 것이다. 학생들은 누구도 이유를 대지 못한다. 정답은 체취를 수집해 경찰견 추적용으로 수집하기 위함이다. 다들 상상하지 못한 집요함이다. 그리고 중간에 인권 문제를 거론한 학생의 자리에 몰래 표시를 한다. 그는 정보요원 적성 검사에서 탈락할 것이다.

강사는 이제 본업으로 복귀한다. 그는 국가안전부 대위 '비즐러'다. 감정이란 없는 듯 추적에만 몰두하는 그의 실력은 슈타지 내에서 정평이 나 있다.

친구인 슈타지 중령 그루비츠 역시 그를 높이 신뢰하며 특별한 임무를 맡긴다. 동독 문화부 장관에게 표적이 된 젊은 작가 '드라이만'을 감시해 불온한 꼬투리를 잡아내라는 지시다.

비즐러는 슈타지 요원들과 함께 드라이만의 집에 잠입해 빈틈없이 도청 장비를 설치한다. 그날 이후 그는 매일 집요하게 드라이만이 집에 머물 때마다 빠짐없이 도·감청을 시행하고 이를 보고서로 기록한다. 물샐 틈 없는 비즐러의 업무능력으로 볼 때 드라이만에게 뭔가 약점이 있다면 걸리지 않을 수가 없다.

슈타지의 구호처럼 '공산당의 방패와 검' 역할에 확신을 지니고 임하던 비즐러는, 그의 임무가 실은 드라이만의 연인인 배우 '크리스타'에게 흑심을 품은 장관이 사주한 것임을 간파한다.

출세를 위해 장관의 부당한 요구를 수락한 그루비츠와 달리 비즐러는 혼란에 빠진다. 자신의 고독한 임무 수행은 그런 비열한 책략의 도구가 되면 안 되는 것이다. 게다가 매일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일상을 염탐하는 사이 비즐러는 그들의 순수한 예술혼과 자유를 갈망하는 양심에 감화되기 시작한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보고되면 신변에 위협이 될 그들의 행동을 적당히 무마한다. 그러나 감시당하는 줄 모르는 드라이만은 위험천만한 거사를 준비하고, 정보기관은 심증을 갖고 그들을 추적하게 된다.

비즐러 역시 상관에 의해 일 처리가 예전 같지 않다는 의구심의 대상이 된다. 어쩌면 정부 요원이 고의로 불순분자를 감싸는 것 아닐까? 이제 비즐러는 자신의 안위부터 걱정해야 할 상황이다. 과연 이 숨 막히는 추적극의 끝은 어떻게 결착이 날까?

독재의 민낯을 묘사하다
 영화 <타인의 삶> 스틸 이미지
ⓒ ㈜트리플픽쳐스
영화의 시대 배경은 1984년. 당시 세계는 미국과 소련을 중심축으로 동서 진영으로 대치하고 있었다. 2차 세계대전 패망 후 독일은 동·서독으로 분단돼 서독은 서유럽의 최전방, 동독은 반대로 동유럽의 최전선에 속했다. 분단국가이자 경제협력 대상이다 보니 남북한에 비교할 바 없이 왕래가 잦고, 서독 TV 방송을 동독 절반 이상 지역에서 수신할 정도였지만 그렇다고 냉전의 그림자가 비껴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국민에 대한 통제는 물리적 개방이 광범위한 만큼 더 치밀하게 조직됐다. 89명당 1명꼴로 슈타지에 고용된 정보원들은 이웃과 가족까지 감시대상에 놓고 시시콜콜 모든 일상을 보고했다. 내가 당사자라면 소름이 끼칠 노릇이다.

통일 이후 어마어마한 분량의 보고서가 공개된다. 슈타지가 해체됐기에 가능한 일이다. 자신의 아내가, 직장 동료가, 친한 이웃이 나를 감시하고 고발했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전율을 금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처벌받은 이는 거의 없고, 실제 물리적 탄압 빈도가 적었기 때문에 그나마 솜방망이에 그쳤다. 하지만 뒤늦게 충격적 사실을 깨닫고 인간관계가 파탄 난 경우는 드물지 않았다. 아무 일 없이 어찌 얼굴 보고 살 수 있을까.

영화는 그런 은밀한 회유와 협박 실태가 마치 재연 영상처럼 그려진다. 드라이만은 동독 체제와 비밀경찰의 억압은 싫지만,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신뢰와 이상은 지닌 인물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정부와 충돌을 피하면서 창작활동에 매진하려 한다. 하지만 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는 명목으로 존경하던 선배 작가가 강제로 작품활동을 봉쇄당한 끝에 실의에 빠져 목숨을 버리자 더는 참지 못하고, 거대한 감옥과 같은 동독의 실상을 고발하기 시작한다.

드라이만의 연인이자 뛰어난 재능을 가진 배우 크리스타 역시 장관의 노골적인 욕망에 굴복하지 않고 맞선다. 그러자 겉으론 사회주의 체제 수호를 내건 고위관료들은 자신의 비열한 욕구를 위해 공권력을 동원한다. 대의명분 운운하지만, 실상은 사리사욕으로 예술가를 지배하려는 의도다. 반항하는 예술가는 활동을 금지한다. 당연히 사회적 생명을 끊는 것이나 진배없다.

<타인의 삶>을 보고 있자면 왜 권위주의 체제에서 어용 예술가들이 득세하고, 표현의 자유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참 예술인들이 박해받는지 정답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대목이다.

이 말은 반대로 문화예술과 미디어의 자유가 훼손당하는 사회라면, 정치 권력의 본질을 의심해야 한다는 명제로 전환될 수 있겠다. 굳이 눈에 띄는 탄압을 하지 않더라도, 부정한 권력 남용에 침묵하면 보상이 주어지고, 이에 굴하지 않고 항거하면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에게 불이익을 주겠다는 암시만으로도 반대세력을 길들이고 분열시킬 수 있다. 드라이만의 이웃집 부인이 도청과정을 우연히 엿보자 요원들이 부인의 인적사항을 열거하며 입 다물 것을 종용하는 장면이 좋은 예시다. 그는 끝까지 가족의 안위를 위해 이웃이 감시당한다는 사실을 알리지 못한다.

물론 그들은 선량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독재에 침묵했거나 선한 이들에게 협조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그런 이웃을 매도하기도 참 곤란한 일이 된다. 비밀경찰은 한번 방관하면 계속 그럴 수밖에 없다는 심리를 거울 보듯 들여다보고 그런 최초의 굴복을 어두운 희열로 완수한다. 분란의 불씨를 뿌리고 서로를 의심하게 만든다. '분열해서 지배'하는 독재 권력의 유구한 법칙이다. 사회주의 이념과는 안드로메다만큼 동떨어진 셈이다. 그렇게 영화는 정치 논쟁 하나 없이 동유럽 사회주의 진영의 실체와 한계를 깔끔히 정리한다.

평범한 이들의 양심이 살아 있다면...
 영화 <타인의 삶> 스틸 이미지
ⓒ ㈜트리플픽쳐스
드라이만과 동료들은 그런 동독 비밀경찰의 추적을 피해가며 진실을 알리고자 모험을 감행한다. 정치적 구호보다 예술가의 사회적 죽음과 정부 통계가 은폐하는 동독의 높은 자살비율을 연결해 드라이만이 익명으로 출간한 글들은 동독 당국을 발칵 뒤집어놓기에 이른다.

억압적 사회에서 문화예술 풍자는 더 급속하게 확산하기 마련이다. 물론 발각되면 활동 중단 정도로 그칠 게 아니라 목숨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그러나 이 문화예술인들은 슈타지가 얼마나 치밀하고 광범위한 포위망을 갖췄는지 실감하지 못한다.

아마 동서 정보기관 간의 대결이었다면, 슈타지의 승리로 끝났을지 모른다. 비즐러와 그루비츠로 대변되는 국가안전부의 실체는 영화 속에서 하나씩 선보이듯 '판옵티콘' 그 자체로 묘사된다.

이에 비해 천성이 예술가인 드라이만 그룹의 작전은 나름대로 이것저것 궁리했다지만 부처님 손바닥 안에 불과하다. 비즐러가 보고서 하나만 제대로 올려도 그들은 죽은 목숨이다. 하지만 비즐러는 내내 망설이고 끝에 가서 놀라운 반전을 불러온다. 대체 왜 이 피도 눈물도 없던 전문가가 약해진 걸까?

그 답은 우리가 흔히 '악의 평범성'이라 부르는 개념과 대척점에서 찾을 수 있겠다. 누군가는 피도 눈물도 없던 그의 변화가 느닷없다 하겠지만, 인간이란 그런 가능성을 숨긴 존재인 법이다.

훗날 드라이만은 무사히 살아남아 새 책을 출간한다. 그 제목 <선한 사람을 위한 소나타>가 어떤 유래를 지녔는지, 그리고 그 첫 장에 기재된 작가의 헌사를 보게 된다면 그게 어떤 뜻인지 이해되리라 믿는다. 나머지는 영화를 차분하게 감상하면 족하다. 우리가 이제는 별 힘이 없을 것이라 무시하던 소박한 양심과 정의가 무엇을 이뤄낼 수 있는지 그대로 나와 있으니 말이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평범한 진실이 가득 담긴 영화다.
 영화 <타인의 삶> 포스터
ⓒ ㈜트리플픽쳐스
[작품정보]

타인의 삶
Das Leben der Anderen
The Lives Of Others
2006 독일 드라마
2024.10.02. (재)개봉 137분 15세 관람가
감독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출연 울리히 뮤흐, 제바스티안 코흐, 마르티나 게덱
수입/제공 ㈜라이브러리컴퍼니
배급 ㈜트리플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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