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인데"…야간통금에 점호까지 받는 필리핀 가사관리사

나상현 2024. 9. 26.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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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오전 서울 강남구 홈스토리생활 회의실에서 열린 서울시 외국인 가사관리사 시범사업 관계자 간담회에서 김선순 서울시 여성가족실장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시범사업으로 한국에 입국한 필리핀 가사관리사들이 공동숙소에서 야간 통금은 물론 직원들의 점호까지 받는 것으로 확인됐다. 자율적인 규칙이라는 관리업체 설명과 배치되는 데다, 근로기준법 위반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노동당국은 법 위반 여부를 검토하겠다는 입장이다.

25일 서울시 등에 따르면 필리핀 가사관리사들은 지난 24일 열린 긴급 현장 간담회에서 “우리는 성인인데 시간을 관리할 자유는 있어야 한다고 본다”며 “일이 끝나고 숙소에 오면 9시쯤 되는데, 통금이 있어 바깥 활동이나 해야 할 일들을 할 시간이 부족하다”고 토로했다. 이날 자리는 최근 한국에 입국한 필리핀 가사관리사 100명 중 2명이 숙소를 무단이탈한 뒤 연락 두절된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들의 고충을 듣기 위해 마련됐다. 가사관리사들은 2개 가사관리 서비스 업체에서 마련한 공동 숙소에서 생활하고 있다.

당초 업체는 자율적인 통금이라는 입장이었다. 간담회에 참석한 업체 관계자는 “실제 숙소에 들어와서 잠을 자고 다른 분께 피해가 안 가는 시간을 10시로 정했다”며 “기숙사 운영의 기본적 원칙은 자율적으로 정리해서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서울시도 “실제 통금 시간을 넘어서 들어온다고 해도 불이익은 없다. 최소한의 규칙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고용노동부와 필리핀 가사관리사들의 설명을 종합하면, 최근 무단이탈이 발생한 이후 숙소 직원들이 통금 시간인 10시에 직접 방에 가사관리사들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율적인 통금 넘어서서 사실상의 점호를 실시하는 것이다. 고용부 관계자는 “이탈에 대한 책임감으로 숙소 직원들이 10시에 방에 있는지 확인하는 것으로 파악했다”고 말했다. 필리핀 가사관리사들도 중앙일보에 “직원들이 매일 점호(roll call)를 한다”고 증언했다.

이같은 통금·점호는 통상 관리 범위를 넘어서서 근로기준법 위반 소지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근로기준법 98조(기숙사 생활의 보장)는 ‘사용자는 사업 또는 사업장의 부속 기숙사에 기숙하는 근로자의 사생활의 자유를 침해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필리핀 가사관리사도 고용허가제(E-9) 비자로 들어온 근로자인 만큼 근로기준법을 동일하게 적용받는다.

만일 안전 등에 관한 사항을 규칙화할 필요가 있다면 같은 법 99조(기숙사 규칙의 작성과 변경)에 따라 근로자 과반수를 대표하는 자의 동의를 받고 ‘기숙사 규칙’을 작성할 수 있다. 하지만 필리핀 가사관리사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명문화된 규칙은 별도로 없다고 한다.

필리핀 가사관리사 A씨는 “필리핀에서 처음 계약했을 때 통금(curfew)은 전혀 듣지 못했던 내용”이라며 “한국에 도착한 이후에 갑자기 구두로 통보해서 당황스러웠다. 자유를 침해하는 규칙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B씨도 “(무단이탈한 2명을 제외하면) 아직 통금을 어긴 사람은 없다. 숙소 현관에 CCTV(폐쇄형 카메라)가 있어 규칙을 어겼을 때 불이익을 당할까 봐 무섭기 때문”이라고 토로했다.

법무법인 원곡의 최정규 변호사는 “회사가 운영하는 기숙사에서 근로기준법 99조을 위반하면 과태료가 부과될 수 있다”며 “이탈을 막겠다는 이유로 통금을 설정하고 점호를 하는 것은 명백한 사생활 침해”라고 밝혔다.

고용부는 통금 규정이 근로기준법 위반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검토하겠다는 입장이다. 고용부 관계자는 “규정이나 법에 저촉되는 사안인지 검토를 해보겠다”며 “기본권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관리할 수 있는 방안을 찾겠다”고 덧붙였다.

한편 필리핀 가사관리사 2명이 무단이탈한 데 대해 임금·생활 문제가 원인이라는 추측이 나오면서 서울시와 고용부는 제도 개선에 나서기로 했다. 가사관리사들이 개인별로 주급제 혹은 월급제를 선택할 수 있게 하거나, E-9 비자 취업 활동 기간을 연장하는 방안 등이 거론된다.

세종=나상현 기자 na.sangh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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