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의 문화의 창] 잡초공적비

2024. 9. 26.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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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사람들은 어려서 자랄 때는 모두들 꽃같이 되기를 바라지만 나이가 들 만큼 들면 잡초 같은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온실 속의 화초 같은 삶을 부러워하는 것은 아니다. 이생진 시인은 ‘풀 되리라’에서 이렇게 읊었다.

어머니 구천에 빌어/ 나 용 되어도/ 나 다시 구천에 빌어/ 풀 되리라//
흙 가까이 살다/ 죽음을 만나도/ 아무렇지도 않은/ 풀 되리라

「 잡초는 생태계 지키는 필수 존재
잡초학회 생기고, 조경에 이용도
청옥산 산마루의 잡초공적비엔
“잡초는 지구의 살갗이다” 선명

강원 평창군 청옥산에 있는 잡초공적비의 모습. 잡초공적비는 30여년동안 유기농업을 실천해 왔던 이해극 한국유기농업협회 회장이 잡초의 위대함을 기리고자 세운 비석이다. 사진 유홍준

잡초란 생물학적인 용어가 아니라, 곡식·농작물·원예작물 등 인간에 의해 재배된 것이 아닌데 저절로 번식하는 잡다한 풀을 말한다. 잡초라면 흔히 개망초·까마중·쇠비름·강아지풀·피·토끼풀·엉겅퀴·질경이 등을 떠올리지만, 맛있는 나물의 재료인 달래·냉이·씀바귀·고사리·고들빼기·쑥·머위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야생초라 불리는 제비꽃·초롱꽃·달개비·민들레·쑥부쟁이·부들·꽃창포 등도 밭에서 농사를 방해하면 잡초로 취급되어 뽑혀나간다.

여름철 농부들은 잡초를 제거하느라 구슬땀을 흘린다. 인류는 농업을 시작한 이래 곡식과 농작물은 많은 영양소를 씨앗이나 열매에 축적하도록 개량하여 왔다. 이에 비해 잡초는 생태 그대로 영양소를 성장과 번식에 사용한다. 그래서 곡식과 농작물은 잡초를 이길 수 없다.

그러나 잡초는 무죄다. 잡초의 해악이란 곡식과 농작물의 생산력 증대라는 기준에서 말하는 것일 뿐, 잡초는 생태계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잡초는 땅의 표토층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잡초들이 사라지면 토양이 황폐해진다. 미국 텍사스의 한 과수원에서는 잡초의 씨를 말려버렸더니 극심한 토양침식과 모래바람으로 몇 년 치 농사를 망쳐 지금은 과수와 잡초를 공생시키고 있다고 한다.

잡초와 공존하는 자연농업 방식으로 토마토를 기르는 모습. 잡초가 작물의 영양분을 뺏어 성장을 방해할 것이라는 편견과 달리, 잡초는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고 작물의 자가면역력 증진에 기여하며 공생한다. 신인섭 기자


지난봄 부여 외산면에 마련한 시골집 산자락에 빈터가 있어 피톤치드가 많이 나온다는 편백나무 묘목을 심었는데 올여름 저 지독한 무더위에 반은 죽고 반만 살아남았다. 괭이질해서 잡초를 제거하고 심은 것은 다 말라죽고, 잡초 속에 버려두듯 심은 것은 잡초와 함께 다 살았다.

잡초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표한 분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우선 잡초를 연구하는 ‘한국잡초학회’가 있다. 조경가 정영선은 잡초, 달리 말하여 야생초를 조경에 끌어들인 것으로 유명하다. 화가 김정헌이 연전에 경기도미술관에서 가진 전시회 주제는 ‘소위 잡초에 대하여’였다. 그래서 농사꾼이 된 철학자 윤구병은 『잡초는 없다』라는 책까지 펴냈다. 그런가 하면 강원도 평창군 청옥산 산마루 속칭 육백마지기에 사비를 들여 ‘잡초공적비’를 세운 분이 있다고 한다.

지난여름 잡초 예찬론자인 김정헌 화백과 이 ‘잡초공적비’를 보러 갔다. 영동고속도로 새말 나들목으로 나와 옛길로 들어서니 갑자기 차창 좌우로 산들이 바짝 따라붙는다. 평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의 아내가 강원도에서는 고개를 돌릴 때마다 산자락이 이마에 부딪친다고 한 말이 실감 났다. 평창읍내를 지나 미탄면 소재지에서 청옥산으로 꺾어 드니 이번에는 깊은 계곡 길로 산속 내장 깊숙이 빨려 들어가 가파른 비탈길을 머리핀처럼 급격히 돌아간다.

그렇게 30여 분 산자락을 타고 올라 정상이 가까워지면서 풍력발전소 바람개비 여남은 개가 돌아가다 멈추고, 멈추다 다시 돌아가고 있다. 포장길이 끝나고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또 어느 만큼 달리니 마침내 고원지대가 펼쳐진다. 드넓은 그 넓이는 산마루 이름 그대로 육백마지기는 될 성싶다.

강원 평창군 청옥산 육백마지기의 모습. 해발 1천250m의 청옥산 육백마지기는 평창군 미탄면과 정선군 정선읍에 걸쳐 있는 산이다. 육백마지기는 '볍씨 600말을 뿌릴 수 있는 넓은 들판'이라는 뜻이라고 전해져 내려온다. 사진 유홍준


잡초공적비는 정상으로 가는 길가에 세워져 있다. 잘 생긴 야무진 바위를 다듬어 ‘잡초공적비’ 다섯 글자를 잡초 빛깔로 또렷이 새겨 넣었다. 이 비는 청옥산 육백마지기 생태농장의 노부부(이해극·윤금순)가 화학비료와 농약으로 황무지로 되어 버린 땅을 30여 년 전(1991년)부터 잡초 농법으로 무농약 농산물을 생산하면서 5년 전(2019년)에 세웠다고 한다. 비석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태초에 이 땅에 주인으로 태어나 잡초라는 이름으로 짓밟히고, 뽑혀져도 그 질진 생명력으로 생채기 난 흙을 품고 보듬어 생명에 터전을 치유하는 위대함을 기리고자 이 비를 세우다.”

그리고 비석 뒷면에 이렇게 쓰여 있다. “잡초는 지구의 살갗이다.”

우리는 돗자리를 펴고 정성을 다해 삼배를 올렸다. 그리고 나는 김정헌이 합죽선에 써온 이생진의 ‘풀 되리라’를 조용히 낭송하였다.

물 가까이 살다/ 물을 만나도/ 아무렇지도 않은/ 풀 되리라//
아버지 날 공부시켜/ 편한 사람 되어도/ 나 다시 공부해서/ 풀 되리라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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