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수의 평양, 평양사람들] 미국 대선 앞둔 기선 제압? 뒤끝 정치?…김정은의 위험한 행보
#1 북한은 2004년 1월 8일 평양을 방문한 미국의 핵물리학자 지그프리드 해커 박사 일행을 영변 핵 단지로 안내했다. 이들을 맞은 이홍섭 영변 원자력연구소장은 “우리(북한)가 만든 걸 보시겠습니까”라며 직원들에게 플루토늄 보관용기인 글로브박스를 회의실로 가져오게 했다. 신발 상자보다 약간 큰 적갈색 글로브박스에는 미닫이 뚜껑이 달린 흰색 나무 상자가, 그 안에는 스티로폼으로 싸여 있는 두 개의 유리병이 들어 있었다. 핵탄두를 제조하는 플루토늄 200g이었다. 북한이 핵물질을 외부에 공개하는 최초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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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핵농축 시설 대놓고 공개
미국 대선 겨냥 도발 수위 조절
한국에는 전쟁 시나리오 위협
북미 정상회담 실패 뒤끝 정치
」
#2 그로부터 6년 뒤. 북한은 2010년 11월 12일 해커 박사 일행을 다시 영변 핵 단지로 데려갔다. 이번에는 북한이 일주일 전에 완공했다고 해커 박사에게 설명한 우라늄 농축 공장이었다. 북한은 고농축 우라늄(HEU)을 생산하기 위해 네덜란드의 ‘알멜로’와 일본의 ‘롯카쇼무라’의 시설을 참고해 자체 제작한 2000개의 원심분리기를 보여줬다. 북한이 HEU 농축 공장을 외부에 알린 것도 이때가 처음이다.
핵무기는 핵물질과 기(고)폭장치, 미사일과 같은 운반 수단 등 3요소가 갖춰져야 완성된다. 이 가운데 가장 핵심은 핵물질인 플루토늄 또는 HEU 확보다. 북한은 시차를 두긴 했지만 핵물질 두 가지 모두를 해커 박사를 공개 통로로 활용했다. 해커 박사는 방북 경험을 담은 자신의 저서 『핵의 변곡점: HINGE POINT』에서 “원심분리기 기술과 가동은 일반적으로 기업 기밀처럼 여긴다”고 썼다. 북한 기술자들은 ‘상부’의 지시로 어쩔 수 없이 보여줘서는 안 되는 시설을 공개하는 눈치였다고 해커 박사는 기억했다. 당시 핵 협상 컨트롤 타워 역할을 했던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이 해커 박사 일행을 만나고 이근 미국국 부국장이 이들의 영변 방문에 동행한 것은 핵 시설 공개가 대미 협상용이라는 북한의 의도를 보여준다.
개발 단계 넘어 핵보유국 과시
그런데 북한은 이후 꼭꼭 숨겨왔던 HEU 농축 시설을 지난 13일 전격 공개했다. 북한 매체들은 이날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핵무기연구소’와 ‘무기급 핵물질 생산기지’를 현지지도한 사실을 전하며 5장의 사진을 실었다. 이날 공개된 사진엔 공장 내부 시설이 그대로 드러냈다. 원심분리기 등 공장의 핵심 시설을 모자이크 처리하지도 않았다. 북한의 의도적인 공개라는 뜻이다. 특히 이번에는 김 위원장이 연출과 주연을 맡았다는 점이 주목된다. 북한이 오는 11월 예정된 미국 대선을 겨냥했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북한이 완전한 핵보유국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몸값을 높여 비핵화가 아닌 핵 군축 협상에 나서겠다는 포석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 덧붙이자면 김 위원장의 ‘뒤끝 정치’의 일환일 수도 있다. 김 위원장은 지난 2019년 2월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직접 담판에 나섰다. 북한에서 전지전능한 신처럼 추앙받는 그였지만 회담은 깨졌다. 보름여 뒤 최선희 외무성 부상(현 외무상)은 외신들을 대상으로 기자회견을 하고 “미국이 황금 같은 기회를 날렸다”며 미국을 탓했다. 5년이 지났지만 북한은 미국 대선을 앞두고 직접 도발 대신 HEU 공장을 이용해 ‘개발 단계에서 협상이 가능했지만 미국이 걷어차는 바람에 북한의 핵 능력은 오히려 올라갔다’는 식으로 트럼프 후보를 향해 발신한 메시지일 수 있다.
다음은 7차 핵실험?
한국 정부는 미국 대통령 선거를 전후한 북한의 7차 핵실험 가능성을 제기한다. 신원식 국가안보실장은 지난 23일 “북한이 기술적 문제 해결을 위해 몇 차례 핵실험이 필요하다”며 “미국 대선 기간에 핵 위협을 부각해 관심을 끌려 할 것”이라고 밝혔다. 조현동 주미 대사도 24일(현지시간) “미국 행정부 교체기에 북한의 중대 도발 가능성은 항상 있었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북한은 2008년 미 대선 직전 단거리 미사일 2발을, 오바마 행정부 출범 직후인 2009년 4월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로 전용할 수 있는 광명성 2호를 발사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재선에 당선된 2012년 12월 역시 ICBM 카드를 꺼냈다. 또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당선된 2016년 선거를 앞두고는 5차 핵실험(9월 9일)에 이어 무수단·북극성-2형·화성-12형 등 중장거리 미사일을 연거푸 쏘아대며 긴장을 고조시켰다. 지난 미국 대선 때인 2020년 북한은 코로나19로 국경을 차단한 채 숨을 고르면서도 김정은 시대 들어 개발한 육·해·공군 신형 무기를 담은 『국가방위력의 강화를 위하여』라는 화보집을 발간하는 선에서 그쳤다. 현재 북한의 특이한 북한의 군사적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7차 핵실험을 우려한 정부 당국자들 역시 핵실험이나 군사 행동이 임박한 조짐은 없다고 밝혔다. 북한은 내년 초까지 줄타기하며 도발 카드를 만지작거릴 것으로 보인다.
심상찮은 김정은 행보
눈길을 끄는 건 한국을 염두에 둔 듯한 김 위원장의 최근 행보다. 김 위원장은 지난 8일 오진우포병종합군관학교를, 11일엔 특수작전무력 훈련기지를 찾았다. 특수작전무력 훈련 기지에선 한국군의 미사일사령부를 촬영한 위성 영상을 띄워 놓고 토론하는 강의실도 보여줬다. 또 12일엔 한국 전역을 사정거리로 둔 600㎜ 방사포 시험 발사를 챙기고, 방문 날짜를 감춘 채 HEU 공장을 방문한 사실을 13일 공개했다. 이어 18일엔 4.5t에 이르는 대형 탄두를 장착하고 방향만 바꾸면 평택 미군 기지를 타격할 수 있는 탄도 미사일 발사를 지켜본 뒤, 저격용 소총을 들고 사격하는 시간도 가졌다.
북한은 치밀한 계산 속에 김 위원장의 활동을 공개한다. 이를 고려하면 그의 최근 행보는 포병으로 전방 공격, 방사포로 한국 전역 타격, 특수부대의 수도권 및 미사일사령부 침투, 핵으로 평택 미군 기지 정밀타격, 요인 암살 등 전쟁 시나리오의 축약판이다.
북한은 다음 달 7일 정기국회 격인 최고인민회의를 열어 헌법을 수정할 예정이다. 지난해 말 김 위원장이 남북관계를 “교전 중인 적대적 관계”라고 규정한 뒤 헌법에 영토 조항을 넣으라고 지시한 데 따른 후속 조치다. 북한이 헌법에서 남북을 2개의 국가로 규정하고, 서해 경계를 지금보다 훨씬 남쪽이라고 주장할 경우 군사 충돌 가능성은 커질 수밖에 없다. 김 위원장의 브레이크 없는 질주와 뒤끝 정치는 여기서 멈춰야 한다.
정용수 통일문화연구소장·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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