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호의 시선] 국민 품에 안긴 ‘육영수 특활비 장부’의 뜻은
8월 7일자 중앙일보 보도로 공개된 ‘육영수 특활비 경리 장부’가 국민 앞에 영구히 전시돼 교육자료로 쓰이게 된다. 1971년부터 3년간 대통령실 제2부속실에서 육영수 여사를 수행한 김두영 전 청와대 비서관은 육 여사가 매달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20만원으로 빈민과 약자를 도운 내역을 꼼꼼히 기록한 장부를 “10월 8일 서울 상암동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에 기증한다”고 필자에게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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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자 돕기에만 쓴 ‘특활비 내역’
내달부터 박정희 기념관 전시
전·현직 영부인, 가서 보고 배우길
」
장부에 따르면 육 여사는 매일 40여 통씩 오는 민원 편지를 바탕으로 기아나 질병에 시달리는 빈민·나환자나 학비가 부족한 학생 등에게 수천~수만원씩 지급했다. 김 비서관은 “육 여사는 대통령에게 받은 특활비를 1원도 빠짐없이 이런 공적 용도로만 썼고, 본인과 가족의 사적 비용은 대통령이 주는 월급에서 썼다”고 했다. 육 여사는 대통령이 매달 20만원짜리 수표를 주면 즉각 김 비서관에게 넘겼고, 김 비서관은 수표를 현금으로 바꿔 보관하면서 매일 육 여사 지시에 따라 약자·빈자를 찾아가 돈을 지급했는데 반드시 ‘헌돈’을 줬다고 한다. 띠지 묶인 빳빳한 신권(관봉권)을 주면 받는 이가 부담을 느낄까 봐 배려했다는 것이다.
김 비서관의 말이다. “삭아빠진 대학 노트 한 권에 기록된 장부가 중앙일보에 공개되자 언론이 앞다퉈 보도하고, 수많은 감사 전화를 받아 깜짝 놀랐다. 고위 공직자 출신 저명인사가 내게 ‘절묘한 타이밍’이라고 하더라. 전·현직 영부인들이 구설수로 시끄러운 마당이니 육 여사의 처신이 장안의 화제가 될 수밖에 없다는 거다. 공감한다.”
‘절묘한 타이밍’이란 말이 딱 맞다. 전 영부인은 “관봉권으로 명품 옷을 사고 딸 문다혜씨에게 수상한 돈뭉치를 입금했다”는 의혹을 받는다. 또 다혜씨가 송기인 신부의 제주 주택을 헐값에 매입한 사실까지 드러나면서 25일 송 신부와 함께 국회 국토위 증인으로 신청(서범수 의원)되는 곤혹을 치르고 있다. 현 영부인은 명품백 수수 논란에 이어 ‘공천 개입’ 의혹에 시달리고 있지 않은가. 국민은 당사자들의 투명한 소명과 검찰의 공정한 수사를 원하고 있다. 특히 현 영부인 김건희 여사는 제기된 의혹들의 근본 원인이 ‘오지랖’이란 한탄까지 나온 ‘과한 소통’이란 지적을 뼈아프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필자가 취재해 보니 김 여사는 여당 정치인들과 문자 소통이 유달리 많고 잦아 사달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 이미 조성돼 있다는 거다. 4·10총선 직전 한동훈 비대위원장에게 보냈다가 ‘읽씹’당한 문자들이 대표적인데, 이런 문자를 다른 여당 의원들과도 많이 주고받았다는 얘기가 나온다.
“나도 여사와 문자 주고받는다”는 수도권 국민의힘 정치인의 말이다. “여사가 별생각 없이 준 문자나 통화 내용을 캡처·녹음해 가진 여당 의원들이 널리고 널렸을 거다. 여사 딴에는 남편 돕는다고 문자를 하는데, 받는 사람 마음은 공천과 관직뿐이니 악용될 소지가 크다. 언제든 폭탄이 될 수 있다.”
이런 여사의 ‘과한 소통’을 제어할 사람은 사실상 없다. 윤석열 대통령에게 김 여사는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로 존중해 주어야 할 대상’이라는 게 여권의 일치된 전언이다. 윤 대통령을 만난 법조계 선배들이 김 여사와 관련해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조언하면 대통령은 “선배님, 저한테 앞으로 그 얘기 하지 마십시오. 제가 집사람한테 그런 말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고 답한다는 것이다. 통화 도중 여사 문제를 조언하면 “네, 알겠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는다는 얘기도 들린다. 비서진들이 ‘여사 문제’만 거론 되면 “그 얘기 내게 하지마”라고 손 사례를 치는 이유다. “대통령에게 할 말은 하겠다”는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도 대통령과 독대 시 건의할 리스트에 여사 문제는 제외했다고 한다. 국민 입장에선 가장 먼저 거론돼야 할 사안이 가장 먼저 빠진 셈이니 독대가 성사돼 봤자 무슨 성과가 날지 의문이다.
김 여사는 며칠 전 “꼭두새벽에 개 끌고 산책 나가 경호진을 고생시켰다”는 구설에 올랐다. 알고 보니 추석 연휴에도 관저 경호하느라 수고하는 군인들에게 간식을 갖다 준 행보가 왜곡돼 전달된 것이었다. 인근 주민 불편을 줄여주려고 일부러 늦은 시각을 택했다는 것이다.
답은 여기에 있다. 김 여사 스타일을 보면, 소통 욕구가 상당하다. 그건 나쁜 게 아니다. 그러나 정치인들과의 문자나 통화는 아무리 좋은 뜻에서 했어도 국정 개입 구설수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 대신 고생하는 공무원이나 생활고에 시달리는 서민을 위로하는 데 소통 욕구를 꾸준히, 진심으로 쏟아붓는다면, 시일은 걸릴지 모르나 국민이 여사에게 닫았던 마음의 문이 열릴 날이 올 수 있을 것이다.
강찬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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