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훈의 푸드로드] ‘로컬 크래프트 진’의 세계가 열린다
1751년 영국의 화가 윌리엄 호가스는 ‘진 골목(Gin Lane·사진)’, ‘맥주 거리(Beer Steer)’라는 제목의 두 개의 대조적인 판화 작품을 동시에 발표했다. 호가스는 ‘진 골목’에서 진이 당시 영국 사회를 파괴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진에 취한 여성이 아기를 방치하는 모습, 진에 취해 쇠약해진 사람, 파괴된 건물, 관을 파는 상점 등이 어둡게 나타나 있다. 반면에 높은 도수의 싸구려 술인 진 대신 맥주를 권장하는 판화인 ‘맥주 거리’는 밝고 긍정적인 분위기로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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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세기 영국 정부 진 생산 장려
품질 낮고 도수 높아 부작용 커
교토 ‘키노비’가 진의 인식 바꿔
지역 향취 담은 술 세계적 인기
」
17세기 말 이후 영국 사회가 진에 중독되기 시작한 이유는 영국 내 곡물 가격의 하락을 막고, 주류 분야 무역 적자를 개선하기 위해 영국 정부가 진의 국내 생산과 판매를 적극 장려했기 때문이다.
영국은 오래전부터 프랑스로부터 와인과 브랜디를 대량으로 수입하던 국가 중 하나였지만, 1688년 명예혁명 이후 프랑스와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프랑스산 주류의 수입을 금지했다. 대신 당시 영국과 관계가 좋아 교류가 많았던 네덜란드의 증류주인 제네버(jenever)를 모방해 진을 영국 내에서 생산하기 시작했다.
진의 원재료는 곡물이기 때문에 당시 과잉 생산으로 가격이 하락하고 있던 곡물을 활용하기에도 좋았다. 1690년 영국 정부는 일종의 진 진흥법을 제정하여 적극적으로 진 생산을 장려했다. 그러나 당시 영국에서 생산된 진은 품질은 엉망이었고 가격은 매우 저렴했다. 음미하고 즐기는 술이 아니라 취하기 위한 높은 도수의 술일 뿐이었다. 영국 사회는 진에 중독되었고 망가져 갔다.
결국 1751년 영국 정부는 강력한 진 규제 정책을 발표하게 되는데, 호가스의 ‘진 골목’과 ‘맥주 거리’는 당시 정부 규제를 지지하고 알리는 일종의 예술가의 사회 계몽적 작품인 것이었다. 이후 진 생산에 높은 세금이 부과되고, 제조 및 판매에도 면허제가 실시되었다. 곧 ‘서민의 술’ 진의 가격이 오르게 되자 사회적 문제가 많이 감소했다. 그랬더니 오히려 진의 품질이 향상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것이 ‘런던 드라이 진(London dry gin)’으로 불리는 타입의 술이다.
진의 품질이 크게 향상되어도 진의 향을 오롯이 즐기는 애주가는 별로 없다. 진은 곡물로 밑술을 빚어 1차 증류를 한 다음, 여기에 노간주나무 열매 등을 넣고 한 번 더 증류한 단순한 술이다. 진은 주로 주스, 탄산수, 시럽 등과 함께 섞어서 다양한 칵테일을 만들 때 사용된다.
2016년, 교토 인근에 있는 한 증류소에서 진 제품 하나를 출시했다. ‘키노비’라는 이름의 진인데, 진에 대한 전 세계인의 인식을 바꾸어 놓았다. 먼저 키노비는 일본을 상징하는 곡물인 쌀로 밑술을 담갔다. 그리고 진이라면 반드시 들어가야 할 노간주나무 열매 이외에, 교토 인근에서 재배한 유자, 녹차, 산초, 차조기잎, 생강, 적송, 대나무잎 등을 각각 증류하여 향을 뽑아낸 다음, 마치 향수를 만들 듯 블랜딩하여 진을 만들었다. 가장 일본답고 교토다운 향을 진에 담아낸 것이다.
이 ‘키노비 진’은 전 세계의 애주가들에 큰 충격을 줬다. 특정 지역 특유의 복합적인 향을 즐기는 즐거움을 제공하는 진이 출시된 것이었다. 곧 전 세계의 진 증류소들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각 지역에 자생하는 허브와 꽃, 열매, 향신료의 향을 담은 로컬 크래프트 진(local craft gin)을 출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드리드 진’에는 마드리드 인근에서 재배한 로즈메리, 피스타치오, 오렌지, 아니스 등 스페인의 향수를 부르는 향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시골로 가보자. 핀란드의 인구 5000명의 작은 마을 이소큐로의 ‘큐로’ 증류소에서는 인근 지역에서 재배하는 호밀로 밑술을 만들고, 지역 작물인 크랜베리, 자작나무 잎 등을 증류해 그 향을 담아 로컬 크래프트 진을 만들어 팔고 있는데, 이 작은 마을 증류소의 2022년 매출이 거의 100억원에 달한다.
지역 농산물을 활용하여 지역 경제에 기여하며 지역 소멸까지 막고 있다. 주요 공항의 면세점에서 기념품으로 판매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사람들은 이제 로컬 크래프트 진을 그 지역의 향을 담은 고급술로 인식하고, 잔에 조심스럽게 따라서 그 향을 음미하며 소비하고 있다.
‘서울 진’을 만든다면 김포 쌀로 밑술을 만들고 국내산 깻잎과 생강, 모과, 매실로 멋진 향을 낸 다음 인천 공항에 놓아 볼까? ‘밀양 진’을 만들어 보자면, ‘경상 민트’로 불리는 방아잎과 제피, 부추잎으로 향을 강렬하게 입혀야겠다. 제주 공항에는 아무래도 제주 메밀로 밑술을 만들고, 감귤 껍질, 찻잎, 고사리 향을 담은 ‘제주 진’을 놓으면 어떨까? 새로운 시장이 열리고 있다.
문정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푸드비즈니스랩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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