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현의 과학 산책] 작은 물방울
1976년 8월 25일. 캐나다의 토론토 대학에 볼프강 하켄(1928~2022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124년 묵은 난제 ‘4색 문제’의 풀이를 발표하기 위함이었다. 소문을 듣고 몰려온 청중들로 대형 강의실은 발 디딜 틈 없었다. 수학사의 극적인 순간이었다. 문제의 시작은 어린아이의 색칠 공부와도 같다. 밑그림 위에 색칠할 때 규칙은 하나다. 두 영역 사이에 경계가 있다면, 두 영역의 색깔은 달라야 한다. 세계지도에서도, 국경을 조금이라도 공유하는 두 나라는 다른 색으로 칠해야 한다. 영국의 수학 애호가 프란시스 거스리는 1852년 재미있는 제안을 한다. 혹시, 네 가지 색깔만으로도 모든 지도를 칠할 수 있을까? ‘4색 문제’의 탄생이다.
이후 100여 년이 흐른 1960년대, 독일의 수학자 하인리히 헤슈(1906~1995년)가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한 국가를 중심으로 나름의 규칙을 가지고 한 단계씩 다른 색깔을 칠하다 보면 4가지 색만으로 세계지도를 채울 수 있다는 논리다. 지도가 넓어질 수록 고려해야 할 경우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지만, 컴퓨터를 이용하면 가능할 것이라는 예측까지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독일 정부의 지원이 없었다. 한편, 헤슈의 강연에서 큰 감명을 받은 미국 수학자 하켄은 동료들과 협업을 시작한다. 결국 미국 정부의 수퍼컴퓨터 지원에 힘입어 하켄이 헤슈의 예측을 실현한다. 문명사의 이정표가 되는 사건이었다. 전통적인 수학 문제를 컴퓨터로 해결한 최초의 사례이기 때문이다. 이후 모든 수학사 교과서에는 하켄이 등장하게 된다. 다만 안타깝게도 헤슈의 이름은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풀이의 자양분이 되고 나서 잊히는 업적이 수학에서는 드물지 않다. 우리의 문명은 거대한 생각의 바다다. 영웅의 업적은 범선처럼 웅장하게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많은 사람의 노력과 깨달음이 이들을 떠받치고 있다. 물방울이 모이지 않는다면, 위대한 항해의 서사도 있을 수 없다.
김상현 고등과학원 수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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