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개월간 알몸생존 생중계쇼…그 청년의 25년후

나원정 2024. 9. 26.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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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경쟁자’에서 나스비는 “‘전파소년’ 이후 고향 후쿠시마에 돌아가 무수한 지역 주민의 손길 덕에 재기할 수 있었다”면서 동일본 대지진 당시 선행에 대해 “그 은혜를 갚고 싶다는 마음도 무의식중에 작용한 것 같다”고 돌아봤다. [AP=연합뉴스]

1998년 1월 일본 도쿄에서 무명 청년 코미디언이 나체로 단칸방에 갇혀, 방송·잡지 경품 응모로만 연명하는 생존 게임에 휘말린다. 주어진 건 경품 응모를 위한 잡지들과 엽서·필기구 뿐. 받은 경품 가격 총합이 100만엔(당시 약 1000만원)에 도달하기 전까지 방에서 나갈 수 없다.

주요 부위만 CG(컴퓨터그래픽)로 가린 그의 알몸 분투기는 매일 24시간 촬영돼 무려 15개월 간 일본 전역에 방영됐다. ‘나스비’(‘가지’라는 뜻, 턱이 가지처럼 길다며 붙은 별명)로 불리는 코미디언 하마츠 도모아키(49)가 25년 전 겪은 잔혹 실화다.

개 사료로 허기를 달래고 고립감에 조울증까지 생긴 그의 기행은 당시 니혼TV 예능 ‘나아가라! 전파소년’ 뿐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 24시간 생중계되고 있었다. 시청자가 1500만명에 달했다. 나스비는 유명인사가 됐지만 정작 본인은 방송 중인 사실조차 몰랐다.

목표(경품 가격 100만엔)를 11개월 만에 달성했지만, 제작진은 그를 한국에서 3개월여 간 추가 감금하고 촬영을 이어갔다. 이 방송 뒷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경쟁자(The Contestant)’(감독 클레어 티틀리)가 지난해 토론토 국제영화제에 공개돼 일본판 ‘트루먼 쇼’라 불리며 큰 화제를 모았다.

나스비가 촬영 84일째 제대로 먹지 못해 야윈 모습이다. [사진 토론토국제영화제]

다큐의 주인공 나스비가 26일 개막하는 제16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를 통해 한국을 찾는다. ‘경쟁자’는 ‘베리테’ 섹션에 초청돼 두 차례(29일, 10월 1일) 상영한다. 방한에 앞서 e메일 인터뷰로 만난 나스비는 “지금도 인간 불신의 감정이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지만, 인간이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절실히 느낀다”고 말했다. ‘전파소년’ 이후 그는 정신적 후유증과 영양실조에 시달렸다.

영국 감독 클레어 티틀리는 무명 코미디언의 인권을 유린해 웃음을 짜낸 1990년대 일본 예능업계의 추악한 민낯을 폭로하지만, 나스비를 가련한 희생자로 남겨두지 않는다. 고향 후쿠시마에서 활동을 이어가던 그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덮친 고향의 재건을 도우며 과거를 극복하는 과정을 뒤쫓는다. 나스비는 “당시 얻은 지명도가 재난 구호 활동에 도움이 됐다”며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인생의 의미를 찾았다”고 덧붙였다.

Q : 힘든 기억을 재조명한 다큐 출연을 수락한 이유는.
A : “클레어 감독의 배려를 느꼈다. 나를 불행한 존재로 보지 않고 ‘전파소년’ 이후 내 삶을 인간 재생 이야기로 그리고 싶다고 했을 때 확신이 생겼다. 내가 걸어온 길이 잘못된 길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됐다.”

Q : 촬영 당시 방문은 잠겨있지 않았는데, 왜 탈출하지 않았나.
A : “폐쇄된 공간에서 고독감을 견디는 동안 도피할 기력조차 잃었다. 스톡홀름 증후군(인질이 범인에게 동조하고 감화되는 비이성적 심리 현상)에 걸린 듯했다.”
몰래카메라로 진행된 ‘전파소년’ 마지막 공개방송 녹화에선 알몸으로 방청객을 맞닥뜨렸다. 다큐에서 츠치야 토시오 PD는 “그 순간 이 쇼가 TV 역사에 남을 거라 생각했다”고 말한다.
“그 말에 위화감을 느꼈지만, 당시 열광하던 방청석을 돌아보면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방송 중 나스비가 쓴 일기는 그의 의사와 무관하게 출간돼 베스트셀러가 됐다. 1년 3개월간 삶을 저당 잡힌 대가는 출연료 1000만엔(약 1억원). ‘전파소년’의 알몸 이미지가 너무 강해 이후 그는 코미디언 활동을 제대로 이어갈 수 없었다.

나스비는 전학이 잦아 외톨이였던 유년 시절 영향으로 코미디언이 되기로 결심했다. 사람들을 웃기는 게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란 걸 터득했기 때문이다. “사람을 웃기면 프로고 웃음거리가 되면 아마추어라고 생각했기에, ‘전파소년’을 하면서 수치심 어린 묘한 자부심을 느꼈다”고 했다. 그가 웃음의 의미를 고쳐 생각하게 된 건 동일본 대지진 때 구호 활동을 하면서다. “내가 웃기건, 웃음거리가 되건 상대방의 웃는 얼굴을 보는 기쁨은 똑같더라”며 “알량한 자부심은 내던지고 산다”고 밝혔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그는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이렇게 썼다. “‘전파소년’ 때 제가 1년 넘게 방안에 혼자 갇혀 생활한 모습 보셨죠. 이번 팬데믹도 함께 극복합시다!” ‘설득력 있네’ 등 호응 댓글이 쇄도했다. 그는 “이런 작품은 주인공 사후에 제작되게 마련인데 저는 건강하게 살아있으니 운이 좋다”며 “인생에서 중요한 것을 고민할 때 이 영화가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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