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도 LG도 눈독 들이는 ‘액체냉각’ 뭐길래
엔비디아가 인공지능(AI) 가속기 차세대 모델 ‘블랙웰’ B200에 액체냉각 방식을 도입하기로 하면서 관련 기술에 관심이 집중된다. AI 가속기 성능 고도화 과정에서 고대역폭메모리(HBM)와 그래픽처리장치(GPU) 등 칩 수가 급증해 발열 이슈가 난제로 떠올랐다. 블랙웰 B200의 최대 소비전력은 1000W(와트)로, 전작 H200(700W)보다 42% 높아졌다. 전력 사용량이 늘면서 열 방출량은 기존보다 4배 가까이 늘었다. AI 데이터센터 설비투자 과정에서 ‘열과의 전쟁’이 화두로 대두되면서 국내 기업도 관련 사업에 줄줄이 뛰어든다.
직접냉각·액침냉각 각광
IT업계와 외신 등에 따르면,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최근 2분기 실적 콘퍼런스콜에서 차세대 AI 가속기 블랙웰을 사용하려면 액체냉각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수랭식 데이터센터에서는 전력 제한이 있는 데이터센터나 어떤 규모의 데이터센터를 선택하든 과거에 비해 3배에서 5배까지 AI 처리량을 설치·배포할 수 있다”며 “액체냉각을 활용하면 총소유비용(TCO)이 개선된다”고 밝혔다. 액체냉각이 ‘게임 체인저’가 될 것이라는 그의 ‘호언장담’에 관련 기술이 산업계 화두로 급부상했다.
AI 데이터센터 운영에는 막대한 전력이 소모된다. 열을 잡지 못하면 반도체 성능이 저하되고 수명도 줄어든다. 현재 AI 데이터센터에서는 찬 바람을 활용한 서버 냉각 방식(공랭식)이 주로 쓰인다. 문제는 기존 공랭식의 경우 전력 소모가 큰 데다 공간을 많이 차지해 AI 데이터센터 총 비용에 큰 부담을 준다는 데 있다. 데이터센터 총 사용 전력 절반 가까이(45%)가 서버 온도를 20~25도로 유지하는 데 쓰인다. 전력을 쏟아부어 냉방 장치를 가동하더라도 AI 데이터센터 내부 온도를 낮추는 데 한계가 있다.
사정이 이렇자 최근 각광받는 기술이 ‘액체냉각’이다. 액체냉각은 ‘수랭식’이라고도 불린다. AI 가속기를 물이 흐르는 파이프로 식히거나 특수 용액에 담그는 방식이다. 고성능 AI 가속기가 탑재된 데이터센터는 액체냉각이 필수가 돼 관련 시장도 지속적으로 커질 전망이다.
수랭식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서버 내부에 설치한 파이프로 차가운 용액을 지속적으로 흘려 칩 발열을 잡는 방식이다. 직접액체냉각(Direct Liquid Cooling·DLC)으로도 불린다. 이 방식은 에어컨 역할을 하는 냉각 팬을 설치할 필요가 없어 소음이 거의 없고 공간 제약도 덜하다. 엔비디아가 블랙웰에 적용하기로 한 게 이 방식이다. 엔비디아는 “열을 식히고 나온 온수를 전력 생산 등 다른 용도에 활용하는 방안도 연구 중”이라고 밝혔다.
둘째, ‘액침냉각(Immersion Cooling)’이다. AI 가속기 여러 대를 연결한 데이터센터 서버를 방수 처리한 뒤 특수용액에 담가 열을 잡는 방식이다. 별도 파이프도 설치할 필요가 없어 공간 최적화는 물론 전력 소모까지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기존 공랭식은 팬 설치는 물론 공기를 흘려보낼 공간이 필요해 서버 간격이 넓어야 하며 천장 공간도 확보돼야 한다. 액침냉각은 그럴 필요가 없으므로 서버를 더 촘촘하게 설치할 수 있다. RSI 데이터센터 건설 컨설팅 자료에 따르면, 액침냉각 방식은 공랭식 대비 서버 공간은 90%, 냉각을 위한 소모 전력은 90%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박준영 현대차증권 애널리스트는 “해외에서는 오래전부터 DLC 방식이 새로운 표준이 될 것이라는 합의가 있었던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액침냉각이 주목받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이준호 상상인증권 애널리스트는 “액침냉각의 에너지 효율이 공랭식 대비 40~50% 유리하고 데이터센터 부지도 절반 정도로 줄일 수 있어 궁극적으로 해당 시스템이 사용될 확률은 상당히 높다”고 평가했다.
다만, 수랭식 냉각은 서버 구축은 물론 관리 비용 부담이 아직 크다. 이 때문에 기존 공랭식과 비용 수준이 비슷해지는 ‘코스트 패러티(Cost Parity)’까지는 적잖은 시일이 소요될 전망이다. 글로벌 투자은행(IB) 모건스탠리에 따르면, 액체냉각이 적용될 엔비디아 블랙웰 서버용 냉각 시스템 비용은 서버 한 대당 약 8만달러(약 1억964만원)다. 공랭식이 적용된 기존 제품 H100 냉각 비용보다 최고 20배 비싸다. 다만, 고가 AI 가속기를 열 손상 없이 더 오래 효율적으로 쓸 수 있어 감가상각 측면에서는 확고부동한 우위에 있다. 장기적으로는 손익 구조 관점에서 유리하다는 게 IT업계 평가다.
국내 대기업 줄줄이 출사표
액체냉각 시장이 각광받으면서 시장 규모도 빠른 속도로 팽창할 전망이다. 시장조사기관 옴디아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액체냉각 시장 규모는 10억달러 수준. 전체 냉각 시장에서 13% 비중이다. 오는 2028년에는 33% 비중으로 높아질 전망이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퓨처마켓인사이트에 따르면, 글로벌 액침냉각 시장 규모는 2022년 3억3000만달러에서 2032년 21억달러로 고성장이 예상된다.
해외에서는 이미 상당수 기업이 액체냉각 시장에 뛰어들었다. 미국 버티브홀딩스는 데이터센터 전력 관리와 냉각 시스템을 제공하는 기업이다. 매출의 30%가 냉각 시스템에서 나온다. 공랭식·수랭식 시스템을 모두 공급하고 있어 해당 분야 글로벌 1위 점유율을 차지한다. 최근에는 액체냉각 기업 쿨테라를 인수하는 등 수랭식 사업 다각화에 나섰다. 이외 프랑스의 슈나이더일렉트릭, 대만의 델타일렉트로닉스도 수랭식 시스템으로 주목받는다.
국내 기업도 미래 성장동력으로 보고 액체냉각 시장에 적극 뛰어드는 분위기다. 특히 정유·석유화학 계열사를 둔 SK, GS, 한화, HD현대가 액침냉각 핵심인 냉각유 시장에서 존재감을 키운다. 글로벌 탈탄소 기조로 새 먹거리 발굴이 절실한 정유업계에서 액침냉각은 지속가능항공유(SAF)와 함께 중장기 성장동력으로 주목받는다.
SK이노베이션과 에쓰오일은 올 하반기 데이터센터용 액침냉각유 제품 개발 완료와 출시를 목표로 속도를 낸다. SK이노베이션은 자회사 SK엔무브가 지난 2022년 국내 최초 냉각 플루이드 개발을 시작으로 액침냉각 시장에 뛰어들었다. 미국 수조형 액침냉각 솔루션 전문기업 GRC에 지분 투자도 단행했다. SK그룹 계열사 간 시너지도 기대된다. 액침냉각을 포함한 AI 데이터센터 솔루션 패키지를 판매하는 방식이 가능하다. SK하이닉스 반도체, SK텔레콤 AI 소프트웨어, SK엔무브 액침냉각 등을 묶은 패키지를 제공하는 식이다. 지난해 11월 SK텔레콤 AI 데이터센터에 SK엔무브 액침냉각유, GRC 설비를 실증한 결과 전체 전력량의 37%를 절감했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SK엔무브 측은 “데이터센터의 경우 윤활기유 기반으로 고인화점 달성이 가능한 제품을 개발 중”이라며 “데이터센터 서버사 인증과 연계해 솔루션 패키지 형태 공급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에쓰오일도 사업 진출을 서두른다. 올 1분기 콘퍼런스콜에서 액침냉각 사업 진출을 공식화한 에쓰오일은 이후 관련 팀 신설 뒤 연구개발(R&D)에 매진하고 있다. 현재 다양한 시제품 라인업을 구축한 뒤 실증 평가를 진행하는 단계다. GS칼텍스는 지난해 말 액침냉각유 브랜드 ‘킥스 이머전 플루이드 S’를 선보였다. HD현대오일뱅크도 ‘엑스티어 E-쿨링 플루이드’를 상표 등록했다.
전자 업종에서는 LG전자가 사업 기회를 노린다. 에어컨 사업에서 축적한 냉난방공조(HVAC) 기술을 활용해 데이터센터 냉각 시장에 도전장을 냈다. 액침냉각 등 신규 솔루션 상용화도 준비 중이다. 이재성 LG전자 부사장은 “데이터센터 냉각 시장 변화에 맞춰 경쟁력을 차별화하기 위해 제품과 솔루션을 강화하고 액체냉각 솔루션 상용화도 발 빠르게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배준희 기자 bae.junhee@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77호 (2024.09.25~2024.10.0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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