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머리에 딩크 선언까지, 아프리카 족장 며느리의 반란
[김상목 기자]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한국 관객이 아프리카 영화를 볼 기회는 과연 얼마나 있을까. 1년에 1번 있다면 그는 다양한 영화를 섭렵하는 관객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영화미학이 한계에 부딪힌 국면에서 아프리카를 위시한 제3세계 영화는 야생의 매력을 뽐내며 구원투수, 혹은 대안의 영감을 낡은 대륙에 선사해 주곤 했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처음으로 장편영화를 제작했던, 대륙의 서쪽 끝 세네갈에서 새로운 영화가 여러 관문을 넘어 한국의 극장가에 도착했다. 라마타-툴레 시 감독의 <바넬과 아다마>는 낯설지만 흥미로운 영화적 감흥을 선사할 미지의 영화다.
▲ '바넬과 아다마' 스틸 |
ⓒ 그린나래미디어(주) |
아다마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형 '에루'의 뒤를 이어 촌장 수업을 마쳤다. 하지만 그는 '바넬'과의 약속에 충실히 따라 세습 촌장 역할을 거부한다. 마을 장로들은 당혹스럽다. 한 번도 의구심을 품지 않던 전통이 무너질 위기이기 때문이다. 이유를 묻자 아다마는 바넬과 함께 물려받은 지위 대신에 마을 외곽에서 독립된 삶을 살겠다고 답한다. 마을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지 않냐는 질문에 아다마는 바넬과 함께 '파묻힌 자들의 집'을 파내고 있음을 밝힌다. 매일 바넬과 아다마는 틈틈이 그곳을 들러 흙을 퍼내는 중이다. 서서히 옛집의 지붕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마을은 자연의 순환에 의지해 살아왔다. 강에는 물고기가 많았고, 정해진 날에 비가 내려 소가 풀을 뜯을 초원과 경작할 밭을 적셔 주었다. 그렇게 마을은 대를 이어 유지되어 왔다. 하지만 바넬과 아다마가 정해진 법칙을 부정하고 그들만의 새로운 삶을 개척하겠다는 결정 이후 이 전통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비는 예정된 시한을 넘겨서도 소식이 없다. 타는 듯한 뙤약볕이 주민들을 괴롭힌다. 마을의 재산인 가축들은 작렬하는 햇볕에 지쳐 하나둘 쓰러진다. 밭은 파종 시기가 한참 지났음에도 메말라 씨를 뿌릴 수 없다. 마을 전체에 불길한 기운이 감돈다. 바넬은 그런 와중에도 아다마와 함께 파묻힌 집을 복구하려 하지만, 아다마는 마을에 닥친 재앙 앞에서 고민이 깊어진다.
바넬은 오랜 전통과 단절해 새로운 출발을 원한다. 그러나 아다마는 가족과 부족을 저버린 까닭에 이런 재난을 불러온 것 아닌지 반문한다. 둘은 점점 대화가 드물어지고, 아다마는 마을을 구하고자 동분서주하지만 달리 소득은 없다. 바넬은 아다마와 소원한 관계에 지치고, 마을 주민들의 냉대에 입을 다문다. 그는 혼자 파묻힌 집 복원에 매달리려 하지만, 살인적인 무더위 탓에 그 역시 쉽지 않다. 과연 이 젊은 연인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 '바넬과 아다마' 스틸 |
ⓒ 그린나래미디어(주) |
세네갈 북부는 사하라 사막과 잇닿아 있다. 세네갈 남부의 주류 부족인 월로프 족과 달리 이 지역은 유목민 풀라 부족의 땅이다. 오랜 세월 월로프 족과는 별개의 사회를 이뤄온 이들은 독실한 수피즘 무슬림이고, 반농반목의 삶을 이어왔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사막화 심화는 그런 이들의 전통적인 생활양식을 파괴적으로 위협하는 중이다. 영화 속에서 그런 위기는 부족에 전승되어 온 절기 개념을 무너뜨리는 가공할 가뭄과 그 파급효과로 구현된다. 사람들은 뙤약볕에 시달려 그늘에 다들 누운 채 움직이지 못하고, 우람하던 소들은 기아와 더위에 지쳐 쓰러진다. 땅은 바짝 메마르고 물도 귀해진다. 하지만 어디론가 떠날 수도 없다. 주변 사방이 다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넬과 아다마>는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그런 수난을 보여줄 생각이 없다. 이미 그런 작업은 적지 않게 공개되기에, 자신은 좀 더 미학적인 방법론을 실현해 보고자 한다. 기아와 가뭄은 마치 모세가 이집트에 경고한 '7가지 재앙'의 현현처럼 암시된다. 재앙을 경고하는 새 떼는 끊임없이 울어대고, 불길함을 전하는 도마뱀 무리가 창궐한다. 초록빛 녹음이 드물지 않던 마을 주변은 어느새 풀과 나무를 보기 어렵다. 강은 사라진 지 오래다. 오직 마른 바닥만 남았다. 소들이 하나둘 쓰러진 자리엔 앙상한 뼈와 미처 다 해체하지 못해 썩어가는 사체가 즐비하다. 그 귀결은 잔뜩 늘어난 무덤가의 스산한 풍경이다. 묵시록 그 자체다.
이런 재앙의 원인은 무엇일까? 아직 위기가 닥치기 이전, 바넬과 아다마가 정답게 어깨를 맞대고 도란도란 환담할 때, 아다마는 장로에게서 들은 이야기라며 예전에 강에 물고기가 넘쳐날 때 일어난 정령과 인간의 갈등을 들려준다. 인간은 자연의 순리를 어기고 자기들 본위로 정령을 무시했다. 그리고 자연은 경고로 재앙을 선사했다고 한다. 이후의 이야기는 전래가 그렇듯 모호하게 사라진다. 바넬은 문득 그 이야기가 떠올라 후일담을 아다마에게 묻지만, 그 역시 온전한 결말을 알지 못한다.
▲ "바넬과 아다마"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 그린나래미디어(주) |
그는 다른 마을 여인들과는 달리 짧은 머리에 활동하기 편한 의상을 고수한다. 족장 가문의 '며느리'인 만큼 시댁에선 당연히 아들 소식을 기다리지만, 바넬은 시어머니에게 당당히 둘만 함께 해로하면 충분하다며 아이 생각이 없음을 밝힌다. 저러다 쫓겨나면 어쩌나 관객이 오히려 숨죽일 법한 순간이다. 쌍둥이로 태어나 마을 학당에서 (전통과 규범을 상징하는) 쿠란 교육 담당하는 형제에게도 그는 스스럼없이 자신의 독립적 삶을 드러낸다. 그런 바넬의 당당함은 동네 여성들과의 불화를 촉발하지만, 바넬은 자신만이 그저 애 낳고 살림하는 도구가 아니라 당당하게 연애한다는 자긍심이 충만하다.
하지만 운명의 상대인 아다마는 어쩔 수 없이 마을에서 물려받은 전통에 신경 쓸 수밖에 없다. 좀 더 마을 형편이 여유롭고 외부와 교류가 일상적이라면 둘의 소망은 좀 더 편하게 이뤄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바깥과 왕래한다는 게 대사로는 들려도 실제 단 한 번도 외부로 나가는 모습은 그려지지 않는 영화 속의 압축된 세계에서 그들의 어깨에 얹힌 짐은 벗어날 수 없는 무게로 작용한다.
그런 상황으로 인해 바넬은 아다마와도 점점 멀어진다. 하지만 언제고 돌아올 것을 믿으며, 이제 바넬은 모두가 말리는 파묻힌 집 복원에 혼자 매달린다. 마치 신의 저주로 멸망한 것처럼 누구도 그 집들이 땅에 묻힌 이유를 알지 못하는 '유령의 땅'에 고립되길 원하는 것이다. 삽으로 파던 땅을 기력도 모자란 바넬이 손으로 흙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실용적인 태도가 아니라 단호한 의지의 표현, 운명을 거역하겠다는 투쟁의 의지다. 마치 무너진 바벨탑을 다시 세우려는 시지프스의 현신처럼 보일 정도다.
▲ '바넬과 아다마' 스틸 |
ⓒ 그린나래미디어(주) |
운명에 순응하며 정해진 삶을 받아들이는 마을 여성들과는 마치 외계에서 온 것처럼 차별화된 바넬의 개성은 그가 인간의 배를 빌어 태어난 물의 정령, 혹은 태양의 여신이란 상상을 자연스럽게 하게 만든다. 그리고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그가 발 딛는 곳마다 과거 원념과 저주가 회오리처럼 밀려든다. 그런 신화적인 설정이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든다.
아마 고대의 특정 신화들, 저주로 계절의 순환이 무너져 재앙을 불러온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 이야기나, 순애보를 바쳤건만 상대에게 배신당해 복수를 감행하는 메데이아의 이야기가 혼합된 다음 고대 그리스 대신에 세네갈 북부 사막으로 무대를 옮긴다면 <바넬과 아다마>가 탄생할 법하다. 세네갈과 프랑스, 두 이질적 세계의 영혼을 함께 가진 젊은 감독은 그런 정체성을 가진 이들만이 구현 가능한 마술적 사실주의 풍경화로 자신 있게 선보인다. 비전문 배우와 실제 배경과의 동기화를 통해 영화는 다큐멘터리도, 사회파 드라마도 아닌 새로운 영역에서 아프리카 영화의 잠재력을 뽐낸다. 이제 낯선 영화와 만날 시간이다.
<작품정보>
바넬과 아다마
Banel & Adama
2023 프랑스, 세네갈, 말리, 카타르 드라마
2024.10.02. 개봉 87분 12세 관람가
연출&각본 라마타-툴레 시
출연 카디 만(바넬 역), 마마두 디알로(아다마 역)
수입/배급 그린나래미디어(주)
제공/공동배급 ㈜레드아이스엔터테인먼트
2023 칸영화제 경쟁
2023 멜버른국제영화제 브라이트 호라이즌상
2023 마라케시국제영화제 감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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