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고 자란 티 난다"... 이 말이 끔찍한 사람들

이진민 2024. 9. 25.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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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웹툰 <집이 없어>

[이진민 기자]

어렸을 때는 쓰러지면 일어나야 한다고 배운다. 주저앉거나 아파하지 말고, 다시 씩씩한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그런데 어떤 상처는 사람을 고꾸라지게 만든다. 마치 허리가 꺾인 나무처럼 다시 꼿꼿한 삶은 꿈꿀 수 없다. 그럼에도 나무는 자란다.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 부러진 나무 사이를 뛰놀던 아이들처럼 사람도 그렇다. 쓰러져도, 자랄 수 있다.

네이버 웹툰 <집이 없어>는 가정폭력을 경험한 10대 청소년에 관한 이야기다. 그들은 쓰러진 상태다. 집에서 뛰쳐나왔지만, 보호받지 못해 방황하고 가족을 버렸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회차가 거듭될수록 캐릭터들은 각자만의 방법으로 상처를 극복하지만, 웹툰은 거기서 끊긴다. 마지막 회차에서 주인공들은 덤덤한 표정으로 고등학교 졸업식을 치른다. 그 너머 미래 이야기는 없다. 그들이 어떤 어른으로 자랐는지,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숨겨둔 조연 캐릭터로 주인공들의 삶을 이미 암시했다. 그들은 어리숙한 10대 캐릭터들과 달리 번듯한 어른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방황했거나, 어두운 과거가 있다고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들 모두 가정폭력 피해자다. 주인공들처럼 방황했고, 자책했고, 쓰러졌었다. 그리고 자랐다. 과연 집이 없는 아이들은 어떤 어른으로 자랐을까.

피해자는 누군가의 어머니가 됐다
 '수현'의 어린 시절과 현재
ⓒ 와난
에피소드 '공민주와 김마리'의 주인공은 민주도, 마리도 아니다. 그들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수현'이다. 모든 것이 완벽한 모범생 민주와 막무가내지만 강단 있는 마리와 달리, 수현은 어둡기만 하다. 아버지는 술을 마시면 폭력적으로 변하고, 동생은 사고만 친다. 그런 가족들 사이에서 어머니는 수현을 유일한 등불로 삼아 지나치게 의존한다.

참다못해 수현은 집밖으로 나오지만, 이번에는 사람들의 시선이 문제다. 친구들은 "담배 냄새난다", "맨날 남자가 바뀐다더라", "성격이 이상하다"며 비꼬고 이웃 주민들은 "아빠 같은 남자 만날 것 같다", "엄마 팔자를 닮은 듯하다"며 저주 섞인 비아냥을 뱉는다. 수현을 괴롭게 하는 건 타인의 냉혹함만이 아니다. 화목하게 노는 다른 가족을 보고 눈물을 글썽이기도 한다.

그런 수현의 꿈은 현모양처. 예쁜 가정을 꾸리고 싶어 하지만, 그 꿈은 다시 사람들의 비웃음 속에서 난도질당한다. 그래도 수현은 내 아이에게 나 같은 경험을 겪지 않게 할 것이라고 되뇐다. 해당 컷들은 회상 장면처럼 연출돼 독자들은 수현의 정체를 두고 분분한 의견을 나눴다. 갑자기 '공민주와 김마리' 에피소드에서 '수현'이란 인물을 등장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알고 보니 수현은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자랐다'는 소리를 꽤나 듣는 민주의 어머니였다. 수현은 어린 시절의 다짐처럼 컸다. 성공한 사업가가 됐고, 행복한 가정을 꾸렸고, 자기 부모처럼 폭력적인 언어가 아닌 사랑 표현을 말하는 어머니가 됐다. 그럼에도 수현에게 쓰러졌던 과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자신에게 과하게 의존했던 어머니처럼 되지 않기 위해 수현은 아예 입을 닫았다. 딸 민주에게 어떠한 힘듦도, 개인적인 이야기도 꺼내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수현은 남편과 이혼을 결심했지만, 민주에게는 꼭꼭 숨긴다. 결국 이 사실을 알게 된 민주가 분노하며 무기력한 아버지를 보살피겠다고 결심하자, 수현의 입에서 진심이 튀어나온다. 네가 나처럼 살지 않기를 바랐다고.

수현은 가정폭력 피해자다. 하지만 폭력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더 나은 어른이자 어머니가 돼 살아갔다. 힘들었던 과거가 잠시 발목을 잡았지만, 그는 외면하는 대신 그 시절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면서 끈끈한 가족 관계를 만들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수현은 어렸을 때처럼 길에서 단란한 한 가족을 만난다. 그래도 더는 울지 않는다.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앞을 향했다.

피해자는 누군가를 돕는 어른으로 자랐다
 <집이 없어> 속 마리의 고모
ⓒ 와난
상처와 함께 자란 또 다른 캐릭터는 마리의 고모다. 에피소드 '김마리'에선 지나칠 만큼 당돌한 마리가 알고 보니 가정 폭력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학교에서는 당당하게 의견 표출하는 교내 기자로 활동하지만, 집에서는 비속어를 남발하며 자신을 비난하는 오빠와 방관하는 아버지에게 시달린다. 이런 집에서 벗어나고자 기숙사를 선택하지만, 오빠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한다.

그런 마리를 도와주는 건 마리의 고모다. 마리를 대신해서 오빠에게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된다"고 말하고, 아버지에게 "마리를 이렇게 키우지 말라"고 경고한다. 고모가 이토록 마리의 일에 달려드는 건 그도 가정 폭력의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고모는 마리의 아버지에게 폭력적인 언어를 들으면서 자랐고, 이를 외면하는 가족과 연을 끊었다.

그러니 겁에 질린 마리를 보며 고모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마리의 아버지를 향해 "나나 마리처럼 맞아서 벌벌 떤 적이 있냐"며 "자기 때리는 놈 얼굴 매일 보고 사는 사람 마음을 알기나 하냐"고 맹렬히 분노한다. 또한 고모는 마리의 죄책감을 껴안는다. 가족을 뒤로하고 기숙사에 가도 되는지 고민하는 마리에게 "너는 어디든 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답한다.

수현이 가정폭력의 대물림을 끊었다면, 마리의 고모는 피해자와 연대했다. 자신과 똑같은 상황에 부닥친 마리를 외면하지 않았으며, 대신 맞서 싸워주고 더 나아가 마리에게 희망을 주는 인물이다. 고모의 도움 덕분에 마리는 피가 섞인 가족이어도, 날 낳은 부모여도 "아무도 나한테 함부로 못 한다"며 당당히 집 밖을 나선다.

'사랑 못 받은 티' 입고 살아가기
 <집이 없어> 속 주연 6인방, 열린 결말로 끝나 작가는 그들의 미래를 상상에 맡겼다
ⓒ 와난
'사랑받고 자란 티가 난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자주 쓰이는 칭찬이다. 가족에게 받은 사랑이 한 사람의 삶을 좌우한다고 보는 것이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가정폭력 피해자에게는 이만큼 끔찍한 문장이 또 없다. 가족을 선택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왜 가정폭력을 감내하고 '사랑 못 받았다'는 꼬리표까지 붙여져야 하는가.

<집이 없어>는 수현과 마리의 고모를 통해 가정폭력 피해자가 지닌 자생력을 보여준다. 그들은 폭력을 겪었다. 어른이 돼서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수현은 불안함을, 고모는 분노를 느끼지만, 이조차도 껴안고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됐다.

이토록 잘 자란 캐릭터들을 보면 열린 결말로 끝난 <집이 없어> 속 주연 6인방이 걱정되지 않는다. 그들도 수현과 고모처럼 크지 않을까. 쓰러졌고 여전히 아프겠지만, 잘 자랄 것이다. 번듯한 나무보다 훨씬 푸르고 투명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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