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 이끈 여공들의 계보... 언니들이 자랑스럽다 [변방에서 안방으로 : 일하는 사람책]
일하는 사람의 기록을 담은 책을 소개한다. 송곳이 되어 준 작가의 경험과 필자의 지금을 들여다보아 변방에서 안방으로 자리를 넓혀 먹고사는 오늘의 온도를 1℃ 올리고자 한다. <기자말>
[최문희 기자]
사람의 인생이 한 권의 책이라면, 본문에 기록되는 삶과 각주에 기록되는 삶이 따로 있는 걸까. 출처, 각종 뜻풀이, 통계 등 본문에 미처 담지 못해 보충 설명을 위한 기능으로 쓰이는 각주와 나는 어쩌면 조금은 닮아 있다. 어쩌면 엄마와 고모도. 나의 부모를 낳아주신 할머니들도. 그들은 적어도 한 시절 지독히 묵묵했다.
"나는 엄마가 먹여 살렸는데"라는 책도 있듯이, 어릴 적부터 내 주변엔 여성이 생계를 책임지는 경우가 발에 치이는 돌만큼 흔했다. 남자들은 종종 파산했다. 엄마들은 청소일, 농사일과 보험업에 종사하는 와중에 퇴근한 뒤 온 식구의 끼니를 차렸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그러나 그들은 공적인 자리에서 자신이 가장임을 드러내지 않는 '암묵적인 룰'을 고수했다. 한쪽의 기를 살리느라 '각주의 삶'에 머물렀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와 친구의 엄마들 다수는 1950~1960년대에 태어났다. 중산층이 아니고선 중학교를 졸업한 뒤 섬유공장에서 일하거나 고교 졸업 후 회계직에서 근무하며 남자 형제의 대학등록금을 버는 경우가 허다했다. 얼마 전 누나가 학비를 보태줘 대학을 다녔다는 60대 성인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여자 형제에게 고마워하는 기색은 찾기 어려웠다. "일찍 졸업하고 경리 하다가 시집가던데, 뭘."
모르는 삶의 곡절이 아들인 그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그 사이 시대는 딸들의 살림 밑천 노동을 당연시했다. 엄마에게 어떤 자긍이 있는지, 살림과 출퇴근을 병행하며 노년이 되어 가는 그녀들에게 직장에 잘 다니고 있는지 안부를 묻는 명절은 지금도 요원하다.
▲ ▲ 책 <체공녀 연대기 1931~2011> |
ⓒ ⓒ 후마니타스 |
솔직히 이 책은 쉽지 않다. 다루는 시대의 폭이 넓기에 차분한 정독이 필요하다. 식민지 시대 당시 일본 자본의 대규모 투자가 부산에 집중됐었다는 사실, 고무신을 생산하는 고무 산업의 여성 노동자 비율이 1920년대 중반~1930년대 중반 68%에 이르렀다는 통계 등 시대별 국내 제조 산업의 현황 사료를 정밀하게 담아냈다.
▲ 고공농성 중인 강주룡과 당시 신문 보도(신문 보도 저작권은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1931년 5월 29일, 새벽부터 당시 약 11m 높이 평양 을밀대 지붕 위로 올라가 1인 시위를 벌였던 평양 평원고무공장 노동자 강주룡의 모습. 임금 삭감에 반대하고 공장주의 횡포를 고발했던 그는 9시간 30분 동안 버티다 결국 경찰에 체포됐고, 단식 투쟁을 벌이다 건강 악화로 풀려났으나 그 해 여름 31세 나이로 숨졌다고 알려져있다. |
ⓒ 북하우스 제공 |
해방 후부터 박정희 시기까지의 노동사와 여성사, 지성사를 연구해온 저자는 이 책으로 미국역사학회가 동아시아 역사 부문 저작물에 수여하는 제임스 팔레 저작상(2023) 등을 수상했다. 여성노동 역사의 한 장면을 들여다보고자 온갖 사료를 섭렵한 저자의 치밀함을 진하게 느낄 수 있다. 뒤쪽에 실린 참고문헌은 이백 편을 훌쩍 넘는다.
산업이란 큰 말 뒤에 숨은 개개인 여성 노동자들
저자는 노동운동가 강주룡과 김진숙의 공통점을 이렇게 꼽는다. 언변이 뛰어나고, 창의적인 전술로 동료 노동자들을 위해 희생을 서슴지 않았다는 것. 그는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로서 여성 노동자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무너뜨리는 인물"들을 시대별로 복원한다. 국내 민주노조 운동의 '큰언니'로 불리는 이철순의 목소리를 빌려 이렇게 독자에게 묻는다.
"그때 우리가(여성 노동자가) 없었더라면?"
실제로 여성 노동자가 없었다면 국내 제조 산업이 제대로 굴러갈 수 있었을까. 저자는 가산디지털단지(가리봉동)를 누볐던 섬유공장 여공들, 부산 방직공장과 김진숙이 올랐던 크레인에 이르기까지, 여공이라는 존재가 한국 근현대사에 어떤 기여를 해왔는지, 어째서 여공의 존재는 노동운동사 주변부에 머물렀는지 조목조목 들여다본다.
이 책은 늘 뒤에서 묵묵히 생활을 도왔으나 저평가되어 온 할머니의 할머니, 엄마와 이모, 국내로 이주해 생계를 부양하는 여성 이주노동자의 생을 복원하는 작업과도 닮아 있다.
중산층 계급이 아니더라도 공장 노동자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교육을 받으며 언론에 자기 목소리를 전달해온 여공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식민지 자본주의 질서에 대항하며 농성을 거듭하다 구속된 부산의 고무농장 여공 박순희, 1933년 소회제사(섬유공장)에서 파업을 이끌고 경성방직 영등포 공장과 조선견직에서 조직가로 일한 유순희도 그중 한 명이다.
이들은 동맹파업을 거듭하며 성차별이 극심했던 1930년대, 산업 전사로 이름을 떨쳤다. 부산 조선방식(조방) 여공들은 "흔히 여자는 다 어리석"은 존재로 바라보지만 "동맹파업을 일으킨 뒤로 단결된 굳센 힘은 회사 중역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할 수 있다"라며 진취적인 면모를 언론을 통해 드러내기도 했다.
1920년대 여공들은 진취적인 이미지로 대중들 사이에서 통용된 바 있다. 김기영의 영화 <하녀>에서 여공은 공장 생활 후 서양식 복장을 하고 노래를 배우며 문화를 즐기는 이미지로도 쓰였다. 그러나 차츰 언론은 공장 내 착취에 대항해 단식 농성을 이어가는 여공들에게 "비참한 삶에 울부짖는 가난한 여자들"이라는 이미지를 씌웠다.
성인 남성을 '표준 시민의 디폴트(기본값)'로 세우자, 여성 노동자에 대한 탄압은 손쉬워졌다. 파업에 몰두하는 여성 요구를 경청하는 대신 그들의 고유한 권리를 우리 시대는 사회적 편견에 '희석'시켰다. 노동자로서의 자율권 대신 '파란만장하고 억센 여자' 꼬리표를 붙였다. 여공들의 수난은 박정희 시대가 되면서 극심해진다.
여공이란 말 없지만 여전한 비정규직
중학교 시절, <전태일 평전>을 읽고 잠 못 드는 날을 보냈던 나는 여성 노동자가 쓴 이야기를 찾아 읽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1962년 10월, 동료가 일하던 도중 폭력과 모욕을 당하던 것을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던 전남방직 섬유 노동자 '김양'은 25살의 나이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는 이 노동사를 기억하지 못한다.
▲ 스물두 살의 노조 활동가이자 숙련 미싱사였던 권미경.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 미경이다"라는 유서를 왼쪽 팔뚝에 남기고 투신했다. |
ⓒ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
"1987년 여름 부산의 국제상사에서 수천 명의 여성 제화공들은 구사대와 경찰의 폭력에 맞서 노동쟁의를 벌였고, 이는 당시 대한조선공사의 노동쟁의와 더불어 노동자 투쟁의 확산을 이끈 초기 투쟁 중 하나였다. 그러나 남성이 지배적인 노조에 비해 여성이 지배적인 노조의 가시성과 영향력은 급격히 감소했다."
- <체공녀 연대기 1931~2011> 중에서
저자는 밝힌다. 현실에서 가족을 부양하면서도 생계 부양의 의무에서 여성은 자유롭다는 사회적 편견이 그들의 개인사와 능력을 평가절하했음을. 1930년대 평양에서도 1960년대 한국의 노동현장에서도 이는 통용되었다. "여공은 남자가 있으니… 삵이 헐해도 상관없다"라고 말하는 1960년대 기업인의 발언을 예로 든 바, 이 편견은 오늘날 일하는 여성의 삶 구석구석에도 스며들어 차별을 정당화시킨다.
우리 사회는 청소 노동자로, 콜센터 상담원으로, 마트 계산원으로 살아가는 엄마와 언니, 우리들을 이제 여공 대신 '비정규직'이라고 부른다. '2023 통계로 보는 남녀의 삶(여성가족부)'을 살펴보면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 비율은 46%로, 남성 비정규직 노동자 비율보다 15.4%가 높다. 단어만 바뀌었을 뿐 '공순이'는 사라지지 않았다.
저자는 노동운동가 김진숙을 논하며 "그의 뛰어난 개인적 자질을 강조하고 여성성은 괄호로 묶는" 노동계의 성차별적인 현실을 꼬집는다. 역동적으로 변화해온 국내 여성 노동운동의 성과도 짚어낸 그는 '젠더'가 한국 노동시장의 변화를 이끈 핵심적 조직 원리임을 인정할 때 오늘의 노동 현실이 납작해지지 않을 수 있다고 밝힌다.
"축포를 쏘기 전에 고개를 돌려 차별 많은 서울의 그늘을 보아 달라."
기륭전자분회가 2008년 발표한 호소문 중 일부다. 수많은 희망버스를 출발하게 했던 김진숙보다 먼저, 2008년과 2010년에 걸쳐 고공농성을 감행했던 기륭전자 여성노동자들도 이 책에 소환된다.
그 무렵 나도 다른 장소 같은 하늘 아래 일하고 있었다. 김소연 분회장을 비롯한 여공들은 복직을 위해 그로부터 십 년 이상 투쟁해왔다. '서울의 그늘'은 오늘날 또 다른 체공녀들의 아픔으로 채워지는 중이다.
요즘 한국적인 게 가장 세계적이라는 자긍이 하늘을 찌른다. '소금땀 비지땀'을 무한정 쏟아야 했던 지난 노동의 역사를 이야기할 기회가 희박해지는 오늘,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명명백백 일하는 사람의 자긍을 밝힌 언니들의 기백을 새겨 본다. 당신들의 삶은 각주가 아니라 양서의 본문에 쓰여지고 있음을, 당신의 노동으로 저녁밥을 뜨고 있음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있다. 언니들이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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