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 자본으로 쏘아 올린 드론 불꽃 ‘예술이네’
‘PST 아트’라고 들어봤는지? 생소하다면 그게 당연하다. 게티재단이 주관하는 미 서부 최대 미술 행사라지만 올해부터 정례화됐다. 제3회 PST 아트가 지난 15일(현지시간) 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에서 개막식과 함께 5개월 대장정에 들어갔다. 중국 현대미술가 차이 구어 치앙의 대규모 불꽃놀이 작품 ‘우리는(We Are)’이 하늘을 수놓으며 포문을 열었다. 통상의 불꽃 원료 대신 유기적인 안료를 사용하고 작가가 자체 개발한 인공지능(AI) 프로그램과 1000여대의 드론을 동원한 불꽃은 ‘예술과 과학의 충돌’이라는 이번 행사 주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프랑스 르피가로, 중국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등 세계 유수의 20여개 매체가 초청된 PST 아트 프레스 프리뷰에 본보도 다녀왔다.
이 행사는 2011년, 2017년 ‘퍼시픽 스탠더드 타임(PST·Percific Standard Time, 태평양표준시)’이라는 이름으로 부정기적으로 열렸다. 그러다 올해부터 ‘PST 아트’로 이름을 바꾸고 5년마다 정기적으로 열기로 했다.
“당신이 돈을 세고 있으면 부자가 아니다”라고 했던 미국 석유재벌 진 폴 게티가 설립한 게티재단은 PST 아트를 통해 로스앤젤레스(LA)를 미국의 새 예술 수도로 키우고자 하는 거 같다. 태평양표준시가 적용되는 LA 등지에는 게티센터, LA카운티미술관(라크마), 해머, 브로드 등 수준 높은 문화 인프라가 있음에도 미국 현대미술의 상징은 뉴욕으로 통하는 게 현실이다. 앞서 10일 게티재단에서 가진 프레스 행사에서 게티재단 최고경영자(CEO) 캐서린 E. 플레밍은 “21세기 글로벌 문화수도로 LA의 입지를 굳히는데 게티가 한 주도적인 역할로 PST 아트를 꼽는 의견이 많았다. 이에 5년 주기의 장기적인 후원 방식을 통해 더 많은 관객을 만날 수 있는 다학제적 협업을 지속하고자 한다”며 포부를 밝혔다.
게티재단은 이번 행사에 2000만 달러(약 268억원)가 넘는 지원금을 투입했다. 덕분에 ‘PST 아트 : 예술과 과학의 충돌’은 내년 2월까지 게티센터, 해머, 라크마, 그리피스천문대, 캘리포니아공과대학(칼텍) 등 70여 곳에서 전방위로 열린다. 참여 작가만 이끼바위쿠르르, 마이클 주 등 한국(계) 작가 17명(팀)을 포함해 전 세계에서 800명이 넘게 초대됐다.
전시 내용은 바이오 기술부터 지속 가능한 농업, 고대 우주론, 원주민의 과학, AI, 환경정의 등을 아우른다. 전시품도 고대 조각에서부터 동시대 현대미술까지 폭넓다. 게티센터에서 하는 전시 ‘루먼(Lumen)’은 중세부터 인류가 연구한 빛과 별, 시간 등 천문학의 역사를 태피스트리, 서적, 시계 등 다양한 유물로 보여준다. ‘미래를 감각하기(Sensing the furture)’전은 1966년 미국에서 로버트 라우센버그 등 예술가와 과학자, 엔지니어 등이 설립한 비영리기구 ‘EAT’의 활동을 조망하며 과학과 예술이 협업한 역사를 끄집어낸다.
라크마에서 하는 ‘우리는 회화 안에서 산다’전은 도자기, 염색 등 중앙아메리카 원주민 예술을 색의 과학이라는 키워드로 풀었다. ‘디지털 증인’전은 사진, 비디오 등 기술의 진화가 반영된 현대미술의 역사를 다뤘다.
‘PST 아트 : 예술과 과학의 충돌’은 주제 덕분에 평소 같으면 미술과 관련 없는 과학 기관도 참여한 게 특징이다. 우주물리학의 산실인 칼텍의 희귀본 도서관에서는 갈릴레오의 책과 현대 미술 작품을 병치하거나 칼텍과 월트디즈니 간 협력을 증거하는 사진을 전시하는 등 과학과 예술의 ‘크로싱 오버’를 소개했다. 나사 제트추진연구소는 글렌데일의 도서관 겸 아트센터에서 ‘혼합된 세계’를 주제로 전시했는데, 센서를 통해 화성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반응해 흔들리는 갈대 설치 작품, 몸에 칩을 넣어 지진을 감각하는 여성의 퍼포먼스 영상 작품 등이 인상적이었다.
비엔날레 등 현대미술행사는 예술감독이 전시 주제를 정하고 이에 맞는 작가를 초대해 전시하는 방식을 취한다. 그런데 PST 아트의 경우 남부 캘리포니아 전역 70여 곳에서 펼쳐지는 초대형 미술 이벤트라 게티재단 존 와인스틴 디렉터의 경우 전체를 조율하고 전시의 성격은 참여기관의 자율성에 맡기는 것으로 보인다.
해머미술관에서 작가 출신 글렌 카이노, 독립 큐레이터 미카 요시타케가 공동 기획한 특별전 ‘숨(쉬다) : 기후 위기 및 사회정의를 향해’는 일본의 요시토모 나라 등 동시대 작가를 대거 초청해 시대적 어젠더를 제시하는 비엔날레의 성격이 짙다. 한국 작가로는 제주 해녀의 합창을 소재로 생태적인 시선을 담긴 영상과 설치로 푼 이끼바위쿠르르, 제주에서 대마도로 떠내려간 해양 쓰레기 문제를 설치 작품으로 푼 양쿠라 등이 여기에 초청됐다.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MOCA) 게펜 컨템포러리에서는 덴마크 현대미술가 올라퍼 엘리아슨의 개인전 ‘올라퍼 엘리아슨 : 오픈’을 꾸몄다. 엘리아슨은 거울과 빛, 물과 하늘을 활용해 유동적이고 상호관계적인 경험을 하게 하는 신작 설치 작품 12점을 공개했다.
PST 아트는 이처럼 비엔날레와 개인전, 기획전의 성격이 혼재하면서도 무엇보다 장기간에 걸친 준비를 통해 리서치 베이스의 전시를 지향한다. 샌디에이고 밍예미술관은 ‘인디고 블루’를 주제로 이집트, 페루, 중국, 일본, 한국 등 전 세계 염색문화를 조명한다. 한국계 작가 크리스틴 킴의 레인코트, 이영민의 조각보 등이 나왔다. 관계자는 “2019년 게티재단 공모에 당선돼 4년 가까이 준비했다”며 “덕분에 32개국에서 180개 작품을 빌려오는 성과를 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헌팅턴 라이브러리의 ‘스톰 클라우드-기후 위기의 기원에 대한 그림 그리기’전은 화석 연료에 기반한 산업혁명이 가져온 기후 위기의 문제를 다룬 전시다. 영국 낭만주의 화가 존 컨스터블의 풍경화에서 화석 연료의 흔적을 보여주고, 화석 수집가 여성의 삶을 조명하고, 패션과 멸종 위기 동물의 연관성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전공이 다른 3명의 큐레이터가 참여한 다학제적 전시의 표본 같은 전시다. 바람의 세기와 온도, 방향을 영상화한 작품(서효정) 등 데이터의 시각화를 주제로 전시한 패서디나의 아트센터디자인대학 한국인 큐레이터 김혜수씨는 “4년이라는 넉넉한 준비 기간, 충분한 자금 지원 덕분에 한국에 리서치를 갈 수 있었다”며 “참여 작가 규모도 통상의 배로 키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로스앤젤레스=글·사진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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