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주 칼럼] 이범호, 믿음의 야구

한승주 2024. 9. 25.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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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주 논설위원

43세 초보 감독 우승 이끌어
카리스마대신 '형님 리더십'

공정한 처분으로 신뢰 쌓고
패배는 자신의 탓으로 돌려

격의없는 소통과 깊은 유대는
어느 조직에서든 필요하다

그는 팀이 몹시 어수선하고 침울한 상황에서 갑자기 감독을 맡게 됐다. 지난겨울 스프링캠프 출발 하루 전날, 후원사로부터 뒷돈을 받은 혐의로 기존 감독이 전격 해임됐다. 선수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개막을 앞둔 중요한 시기, 구단은 타격 코치를 신임 사령탑으로 임명했다. 1981년생 43세, 프로야구 10개 구단 중 최연소 감독이 된 KIA 타이거즈 이범호 이야기다. 팀 최고참 선수 최형우와 불과 2살 차이인 초보 감독에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2017년 코리안시리즈 만루 홈런으로 타이거즈를 우승으로 이끌었던 선수 이범호는 감독 부임 첫해인 올해 7년 만의 정규 시즌 우승을 이뤘다.

2024년 KIA 타이거즈 우승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으나 가장 큰 것은 이범호 감독의 리더십이다. 코치 시절부터 지켜본 선수 개개인에 대한 높은 이해와 유대감을 바탕으로 친근한 선배 같은 지도력을 펼쳤다. 카리스마보다는 온유한 ‘형님 리더십’이다. 그의 일성은 “즐거운 마음으로 운동하자”였다. “나는 초보지만 선수들은 베테랑”이라고 했다. 권위를 내세우지는 않지만 결단해야 할 땐 확실했다. 그의 리더십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팀의 에이스인 ‘대투수’ 양현종이 승리 투수 요건에 아웃카운트 하나만을 남긴 5회 2아웃. 이 감독은 흔들리는 양현종을 과감히 교체했다. 압권은 다음이었다. 감독은 낙담한 양현종에게 다가가 백허그를 하며 달랬다. 고참 에이스를 단호하게 교체할 감독은 있어도 선수들이 다 지켜보는 더그아웃에서 교체된 선수를 다독일 감독은 많지 않다. 그는 “한 명을 생각하다가 그라운드에서 열심히 뛰고 있는 다른 선수들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감독으로 가장 어려운 건 선수 투입과 교체라고 말했다. 선수가 안 좋을 때 잘 빼줘야 흔들림 없이 다음 경기에서 잘할 수 있다는 것. 교체가 납득이 되고 처분이 공정해야 감독과 선수 간 믿음이 안 깨진다. 이범호가 야구를 하고 선수를 생각하는 방식이다. 이것이 이범호의 믿음의 야구다.

감독의 리더십은 팀이 위기에 빠지고 분위기가 안 좋을 때 더 확실히 드러난다. 올 시즌 한 경기에서 무려 30점을 실점한 적이 있다. 감독이 선수들을 불러 모아 크게 질책했을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 그는 “지나간 경기는 지나간 경기”라며 “선수들이 상황을 더 잘 알고 울분을 토하고 있을 거라 미팅을 따로 잡지 않았다”고 했다. 불러서 따끔하게 혼을 내기보다는 선수들이 알아서 깨닫고 다음엔 잘하겠지 하고 믿어주는 게 그의 스타일이다. 14대 1로 이기다가 연거푸 실점을 허용해 15대 15 무승부로 끝난 경기도 있었는데, 감독은 화내기는커녕 선수들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불펜 투수 운영에서 데이터만 들여다봤던 내 잘못”이라고 오히려 사과한 것이다. 공은 자기 과실로 챙기고, 과는 부하 직원의 탓으로 돌리는 리더가 적지 않은데 그는 정반대로 한 것이다.

그는 정말 선수를 믿었다. 주장인 나성범이 시즌 중반까지 극도로 부진해 팬들마저 등을 돌렸을 때도 그는 “나성범은 한국에서 가장 잘 치는 타자 중 한 명”이라며 타격감이 살아날 때까지 믿었다. 부진했던 다른 선수들도 믿고 기다리고 기회를 줬다.

KIA는 올해 유난히 부상 선수가 많았다. 특히 선발투수 윌 클로우, 이의리, 윤영철, 제임스 네일이 부상으로 빠지며 큰 위기를 맞았다. 그는 빈자리에 2000년대생 투수를 불렀다. 2군에 있던 황동하와 김기훈을 믿고 기회를 줬고, 이들은 그 기대에 부응했다. 올 시즌 MVP가 유력한 김도영을 단순히 안타 치고 발이 빠른 선수가 아니라, 홈런 타자로 키운 것도 감독의 안목이었다. ‘불펜진 3연투 금지’ 원칙으로 선수들의 과부하를 막은 것도 주효했다. 감독이 이 정도로 배려하고, 잠재력이 충분히 발휘되도록 기다려준다면 선수들은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이는 야구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느 회사든 어떤 조직이든 마찬가지다. 아이를 키우는 일도 그렇다. 격의 없는 대화를 통해 아이나 후배나 아랫사람의 특성을 잘 파악하고, 믿어주면서 스스로 잘할 수 있게 기다려주는 일, 조급하지 않게 시간을 주는 리더십이라면 신뢰와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감독으로서 이범호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믿음의 리더십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가을이다.

한승주 논설위원 sj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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