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우라늄 시설 공개는 북한의 ‘회색지대’ 전략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최근 현장 시찰한 대규모 고농축우라늄(HEU) 제조시설을 북한 선전 매체가 사상 처음 외부에 공개했다. 영국 매체는 미들버리 국제학연구소 제프리 루이스 박사를 인용해 핵시설 위치가 평양 인근 강선단지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다.
미국의 핵전문가인 데이비드 올브라이트 과학국제안보연구소(ISIS) 소장은 파키스탄과 북한 유착 의혹을 제기했다. 북한이 공개한 원심분리기는 1990년대 말 파키스탄의 핵 과학자 압둘 칸 박사가 설계한 P2 모델의 설계도를 넘겨받은 북한이 탄소 함량이 극히 낮은 고강도 합금강(마레이징강)으로 개량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향후 더 진전된 개량형을 만들어 우라늄 농축 능력을 지금보다 30% 이상 높일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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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선 앞둔 미국에 경고·협상 신호
분쟁 특성·형태·양상에 변화 예고
‘회색지대 딜레마’ 돌파구 찾아야
」
아산정책연구원과 미국 랜드연구소 공동 보고서는 북한은 약 180발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2030년에는 약 300발로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 보고서는 북한의 최대 보유 목표량을 500발로 봤다.
핵물질 생산 시설을 공개한 북한의 최근 움직임이 오는 11월 5일 치르는 미국 대선을 겨냥한 상투적인 몸값 올리기라는 분석도 있다. 7차 핵실험보다 수위를 낮춘 저강도 도발로 미국에 경고 메시지를 보내고, 차기 미국 행정부에 핵 동결을 전제로 한 군축 협상에 나설 수 있다는 신호라는 것이다.
북한은 민족 명절인 추석을 앞둔 지난 14일부터 이틀 동안 오물 풍선 약 160개를 동족이 사는 남쪽으로 날려 보냈고 지난 18일과 22일에도 살포했다. 지난 12일에는 단거리탄도미사일의 일종인 600㎜ 초대형 방사포를 발사하고, 18일에는 단거리 탄도미사일 여러 발로 유엔 제재를 위반했다. 민족의 명절을 철저히 무시한 것이 ‘두 국가’ 선언에 따른 계산된 행보란 해석도 있다.
이런 전방위적 도발 사례를 연결하면 북한식 회색지대 전략의 윤곽이 엿보인다. ‘회색지대(gray zone)’란 용어는 2010년 미국의 4개년 국방검토(QDR)에 처음 등장했다. 회색지대는 분쟁 스펙트럼에서 전쟁을 어느 한쪽 끝에, 평화를 반대쪽 끝에 놓은 연속 선상에서 그사이에 형성되는 공간을 말한다.
프로이센 왕국의 군인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전쟁론』에서 “모든 시대에는 고유한 전쟁 형태가 존재하며… 전쟁은 주어진 상황에 따라 특성이 조금씩 변형되는 진정한 카멜레온 그 이상”이라고 갈파했다. 지금 한반도 북쪽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21세기 새로운 분쟁의 색깔은 회색이다. 회색지대 분쟁은 단지 카멜레온처럼 색깔만 바꾼 것이 아니다. 분쟁의 특성·형태·양상 등에 중대한 변화가 벌어질 것을 예고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하이브리드 전쟁’이 종종 거론되고, 남중국해에서는 필리핀과 중국의 영유권 분쟁을 놓고 ‘회색지대 분쟁’이란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하이브리드 전쟁은 군사적 수단의 사용을 포함하지만, 회색지대 분쟁은 기본적으로 비군사적 수단에 국한된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다. 물론 양자 간에도 중복되는 부분이 존재한다.
북한이 7차 핵실험 대신 HEU 시설을 공개한 것은 김정은이 강조한 핵무기 숫자의 기하급수적 확대 발언이 빈말이 아님을 입증하려는 속셈으로 읽힌다. 북한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의 핵 위협이 얼마나 큰 효과를 거두는지 실감하고 있다. 핵무기는 우뚝 솟은 병풍처럼 짙은 ‘핵 그림자(nuclear shadow)’를 드리운다.
핵무기는 존재 자체만으로 위협이다. 그래서 상대의 심리·판단·행동에 강력한 억제 효과를 발휘한다. 이러한 핵 억제력 덕분에 북한은 보복이나 처벌을 별로 걱정하지 않은 채 미사일 발사, 오물 풍선 살포, 사이버 공격, GPS 전파 교란 등을 자행하는 것이다.
지금의 회색지대 구도에서 비핵보유 방어자(한국)는 대응의 딜레마에 빠진다. 어떠한 대응도 핵무장 공격자(북한)에 확전(핵 전쟁)의 빌미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도권 회복이 시급하다. 도발과 공격을 먼저 당한 다음에 사후적·반응적 대책을 세우는 것은 하책(下策)이다. 회색지대 딜레마에서 벗어날 새로운 돌파구 차원에서 북한 인권 카드 등을 모색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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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승종 대전대 군사학과 특임교수·한국국가전략연구원 외교안보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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