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미의 마음 읽기] 3촌이라는 거리

2024. 9. 25. 00:26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최은미 소설가

십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명절마다 조카에 대한 사랑을 감추지 않는 친구나 지인들을 남몰래 얄미워하곤 했다. 그들은 대개 본인은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기혼의 형제자매를 둔 이들이었다. 한창 미취학 아동을 육아 중이던 내게 그들은 육아하지 않는 자의 품위는 품위대로 지키면서도 한 생명이 태어나 자라는 놀라움은 놀라움대로 누리는 특권자들 같았다. 나에게 아직 조카라는 존재가 없었던 그때, 나는 그들이 기꺼이 조카 바라기일 수 있는 건 자기 아이가 없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이를 키우고 있다면 저렇게 해맑기만 한 사랑을 누군가에게 나누어줄 에너지는 남아 있지 않을 거라고.

「 아이 양육에 사랑 다 썼단 생각
조카에 빠져들며 틀린 줄 알아
타인에게도 사랑 나눌 수 있고
‘3촌’처럼 가까운 관계도 가능

[일러스트=김회룡]

후에 남동생이 딸을 낳아 내게 조카가 생겼을 때, 나는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스스로가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로 조카한테 빠져들었다. 떠올리기만 해도 좋았고 만나면 더 좋았다. 조카와 있으면 흔히 하는 비유대로 ‘무장 해제’가 되었다. 유치원생일 무렵 조카는 사랑받는 자 특유의 당당함으로 나한테 이렇게 말하곤 했다. “고모는 날 좀 덜 사랑할 순 없어?” 그러면서도 만나기만 하면 그 조그만 얼굴에서 좋음을 감추지 못했다.

친족간의 멀고 가까움을 나타내기 위해 고안된 한국의 계촌법에 따르면 나와 조카와의 거리는 3촌이다. 형제간인 나와 동생의 거리 2촌, 부모자식간인 동생과 조카의 거리 1촌이 더해진 결과다. 조카가 생긴 뒤로 나는 자신의 자녀 유무와 조카에 대한 마음은 별개일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조카에 대한 애정과 내 아이에 대한 애정이 조금은 다른 에너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엘레나 메델의 소설 『소유에 관한 아주 짧은 관심』에는 서로에게 기대되는 바에 어긋나지 않게 자기가 맡은 역할을 할 뿐인 가족의 모습이 나온다. 부모는 부모처럼 행동한다. 자식들은 자식들처럼 행동한다. 엄마들은 딸에게 할 거라고 다들 기대하는 딱 그런 방식으로 행동한다.

주인공 알리시아의 엄마는 어떻게 하면 남자에게 존중받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때가 되기 전에 임신부터 하는 걸 막을 수 있는지 가르치고 통제하면서도 토요일에 집에 박혀 있거나 학년 말 여행에 참석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걱정을 늘어놓는다. 알리시아는 엄마가 잠들기 전에 다음 날 해야 할 일의 목록을 적어놓고 한 단계씩 실행하는 건 아닌가 상상한다. ‘오늘은 이해심 많은 모습 보여주기’, ‘내일은 아이의 미래 계획에 관해 관심 보이기’ 이런 식으로.

역할에 잡혀 있는 한 무장을 완전히 해제하는 건 어쩌면 불가능에 가깝다. 1촌 사이일수록 사회가 오랫동안 요구하고 주입해온 역할에서 놓여나기는 더욱 어렵다. 조카 앞에서 해제되어보고 나서야 나는 내가 누군가의 딸이었을 때부터, 누군가의 엄마가 되고 나서는 더더욱, 무장을 제대로 내려 놓아본 적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어렸을 때 1촌한테 혼나 울고 있을 때 나를 달래주곤 했던 3촌 거리의 사람들을 생각했고, 내 아이에게도 1촌인 나뿐만 아니라 3촌들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3촌들, 고모와 삼촌과 이모들이 꼭 25%의 유전자를 나눈 혈연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조카가 나에게 가르쳐준 건 내가 내 아이를 양육하느라 다 써버렸다고 생각한 사랑이 나 자신도 모를 규모로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혈연뿐 아니라 삶으로 엮인 타인들에게도 그것을 퍼 올릴 수 있다는 어떤 가능성, 조카는 내게 그걸 알게 해주었다.

다가오는 10월 주말에 나는 조카와 1박으로 데이트 약속을 잡아두었다. 조카를 알아온 지 십년이나 되었지만 돌아보니 조카와 단둘이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조카의 사촌 언니인 내 딸은 잠시 먼 곳으로 가 학교를 다니는 중이고 조카의 어린 동생은 엄마 아빠와 떨어져서는 잠을 자지 못한다. 조카와 나는 처음으로 서로를 독점할 수 있는 시간을 앞두고 있다.

조카한테 잊지 못할 유년의 하루를 선물해주고 싶다는 의욕에 여러 요리 레시피와 장소 검색을 한다. 열 살 아이가 좋아할 만한 것들도 검색해 저장해둔다. 조카에게는 이모도 있기 때문에 나는 조카가 이모보다 고모를 더 사랑하게 만들어야지 생각한다. ‘고모’라는 호칭에서 연상되는 것들이 ‘이모’보다 좋지 않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며 세상 어디에서도 회자하거나 재현된 적 없는 새로운 고모가 되겠다고 결심해본다. 3촌이라는 관계가 주는 딱 그 거리 안에서 품위 있고 해맑은 사랑을 마음껏 퍼 올리겠다고.

최은미 소설가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