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고은의 모서리를 접는 마음] 기억의 생존배낭
어느 베이글 가게의 인쇄물에서 ‘내가 좋아하는 순간’ 31가지에 대한 글을 봤다. 즉각 공감되지 않는 항목이 더 흥미롭게 느껴졌다. 이를테면 귓불을 만질 때라든가 스리라차 소스 뚜껑을 열 때 같은 것. 목록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내가 좋아하는 순간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다. 벽이나 바닥에 생기는 빛 그림자를 볼 때, 초가을의 서늘한 공기를 느낄 때… 나열하다 보니 금세 서른하나를 채울 듯했지만, 베이글을 다 먹은 후 중단됐다.
그 목록을 다시 떠올린 건 최근 건강검진을 하면서였다. 사정상 비수면으로 위내시경 검사를 받아야 했는데, 지인들이 비수면 위내시경에 대한 괴로움을 너무도 생생하게 들려주었기 때문에 검사일 아침까지도 내 기분은 온통 흙빛이었다. 결국 그 순간은 왔고, 내키지 않는 자세로 검사실 침대에 모로 누웠다. 어쩐지 반성하는 마음이 되는 그 자세 말이다. 차트에는 ‘비수면 처음입니다’라는 메모가 적혀 있었다. 최대한 호기롭게 입을 벌렸지만 엄습하는 공포감을 막을 길이… 그때 내가 작성하다 만 목록이 떠올랐던 것이다. 특히 ‘우리 가족의 반려견 꼬미의 꼬리를 볼 때’라는 항목이. 재잘대는 꼬리, 분수처럼 솟은 꼬리가 움직이는 장면에 집중하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때 알았다. 좋아하는 것의 목록을 적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그건 비상시에 언제든 들고 뛰어나갈 수 있는, 기억의 생존배낭 같은 것이다. 위내시경이 몸에 머무는 시간은 겨우 몇 분에 불과한데, 만약 내게 준비된 생존배낭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푸른 초원 같은 막연한 이미지 사이에서 허둥대지 않았을까? 어렸을 때는 좋아하는 음악과 영화와 장소를 기록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그러다 기억할 날들이 더 많아지자 소홀해졌던 것인데, 내 안에 있는 것 같아도 필요할 때 찾지 못하면 무슨 소용? 구체적인 문장으로 잡아둔 기억들은 멀리 가지 않는다. 그게 기록의 힘이다.
윤고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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