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잊고 있었던 일본의 반란…이치리키, 응씨배 우승
일본의 일인자 이치리키 료 9단이 응씨배에서 우승했다.
준결승에서 중국의 커제 9단을 만나 3번기의 첫판을 지고도 2승1패로 결승에 올랐다. 중국 셰커 9단과의 결승전은 3대0 완승. 이게 무슨 일인가. 우연인가. 우연일 리 없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일본바둑의 자신감이 이 결승전에서 폭발한 느낌이다.
일본이 세계 대회에서 마지막으로 우승한 것은 19년 전인 2005년 LG배였다. 그나마 우승자는 대만 출신의 장쉬 9단. 일본인 우승자는 1997년 후지쓰배의 고바야시 고이치 9단이었으니 무려 27년 전의 일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지만, 일본바둑은 강산이 변하고 또 변하는데도 잠에서 깨어날 줄을 몰랐다. 세계 무대 연전연패는 치욕스러운 일이었지만, 일본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못 본 척했다. 침묵이나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일본바둑은 끝없이 추락했다. 한 예로 2002~2004년 3년간 일본은 삼성화재배 통합 예선에 179명이 참가했으나 본선 진출에 성공한 기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정상급 기사들은 일본 내 일정을 핑계로 세계 대회를 외면함으로써 수모를 피했다. 이 와중에 일본이 세계 최초의 세계 대회로 내세웠던 후지쓰배가 문을 닫았다. 회사 문제도 있었지만, 도쿄에서 한국 기사끼리 결승전을 연달아 치르는 상황도 한몫했다. 도요타덴소배도 사라졌다.
이런 가운데 전통의 3대 기전이 버틴 것은 기적이었다. 본인방전이 최근 대폭 축소됐지만, 요미우리 신문의 기성전과 아사히 신문의 명인전은 규모와 전통을 유지했다. 전국의 명소를 돌며 7판의 도전기를 치르고 이틀거리 바둑을 고수했다.
이야마 유타 9단이라는 탁월한 인물의 등장이 혹한기를 버티는 데 큰 힘이 됐다. 그는 20세 때 최연소 명인이 되더니 3대 기전은 물론 7대 기전을 휩쓸고 조치훈 9단이 세웠던 본인방 10연패의 기록도 깨뜨렸다. 파죽지세였다. 하지만 그는 국내 일정을 앞세우며 한국과 중국의 세계 대회에 거의 참가하지 않았다. 만약 이야마마저 국제무대에서 참패한다면 일본 팬들에게 뭐라 해야 할까. 일본기원은 그걸 걱정했는지도 모르겠다. 하나 어떤 연유든 세계 무대를 외면한다는 것은 승부사로서는 괴로운 일이다. 이야마는 결국 세계 대회 참가로 방향을 틀었고 2018년 LG배에서 준우승하기도 했다. 때를 놓쳤는지 우승은 없었다.
이치리키 료는 달랐다. 그는 이야마와 국내 패권을 다투면서도 세계 대회에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지난번 응씨배에선 4강에 오르더니 이번에 결국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일본이 간절히 고대하던 우승컵이었다. 거의 모든 일본 매스컴이 우승 소식을 보도했다. 이치리키는 아사히와의 인터뷰에서 세계 바둑의 판도를 이렇게 말했다.
“최강자는 신진서 9단이다. 그는 한 단계 위다. 그 외엔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AI의 영향도 있어 톱 층의 실력은 팽팽해지고 있다. 단지 중국에는 톱에 필적하는 기사가 30~40명 있다. 그런 두께를 일본도 만들어가야 한다.”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세계 대회 우승은 큰 의미가 있다. 계속 도전하고 싶다. 일본 전체의 수준을 올리는 데 앞장서고 싶다.”
이치리키 료는 27세. 이야마 유타는 35세. 일본바둑도 이들의 뒤를 이을 신인의 얼굴이 뚜렷하지 않다는 게 고민이다. 한국도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지만, 신진서는 일당백이고 이제 겨우 24세다.
일본바둑은 바둑의 한 면, 한 시대를 대변한다. 느림이랄까, 고졸한 맛이 있다. 함께 숨 쉬며 고락을 함께하는 옛 승부의 정취도 있다. 이치리키의 우승과 더불어 일본바둑이 일어서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일본의 부흥은 세계 바둑에도 큰 힘이 될 것이다. 일본바둑이 지닌 형식미·전통미도 바둑의 외양을 꾸미는 데 도움이 된다. 얼마 전 일본은 우주류 다케미야 9단의 아들인 47세의 다케미야 요코 6단을 일본기원 이사장으로 선출했다. 일본 내에서도 변화를 원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박치문 바둑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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