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증시 단기 랠리냐 변동성 확대냐
AI 버블·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은 변수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빅컷(0.05%포인트 인하)’을 단행하며 통화 정책 긴축 기조는 4년 반 만에 사실상 마침표를 찍었다. 이번 금리 인하는 경기 연착륙 유도를 위한 ‘보험성 인하’라는 점에서 침체가 현실화했을 경우 이에 대응하기 위한 ‘리세션 컷(Recession Cut)’과는 구분된다. 경기 침체 진단이 내려지지 않은 가운데 연착륙을 위해 단행된 선제적 금리 인하이므로, 향후 세계 증시에는 대체로 우호적 환경이 펼쳐질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다만, 일각에서는 인공지능(AI) 버블 우려와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 등으로 시장 변동성이 확대될 가능성을 열어둬야 한다는 신중론도 팽배하다.
과거 보험성 금리 인하 어땠나
1995년·2019년 때와 비슷
삼성자산운용에 따르면, 1990년 이후 미국 금리 인하는 1990년, 1995년, 2001년, 2007년, 2019년 등 모두 5차례였다. 이 가운데 이번과 거시경제 환경이 비슷한 금리 인하 사례는 1995년과 2019년, 두 차례라는 게 삼성자산운용 진단이다. 두 경우 모두 경기 연착륙 유도를 위한 선제적 금리 인하로 평가된다. 다만, 이땐 금리 인하폭이 0.25%포인트로 완만했다는 게 차이점이다. 이외 1990년(걸프전), 2001년(닷컴버블과 9·11 테러), 2007년(미국발 금융위기) 등은 경기 침체에 적극 대응하려는 ‘리세션 컷’으로 볼 수 있다.
1990년대 미 연준은 1995년 2월 금리 동결 뒤 7월 첫 금리 인하를 시작으로 그해 0.25%포인트씩 세 차례 금리를 낮췄다. 앨런 그린스펀 당시 미 연준 의장은 인플레이션이 완화하는 가운데 경기 성장세가 둔화하자 선제적 대응을 위해 금리를 인하했다. 첫 번째 인하 후 약 3개월간 주식, 채권 등 위험·안전자산 모두 완만한 상승세를 탔다. 다만, 당시 금리 인하는 1999년부터 2000년 상반기까지 기록적인 상승세를 보인 ‘IT 버블’을 초래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1995년 금리 인하 뒤 폭등세를 보인 세계 증시는 과도한 설비투자와 공급 과잉으로 거품이 붕괴되자 폭락세로 돌변했다.
2019년 세계 경제는 미국과 중국 간 무역전쟁 발발로 경기 침체 우려가 고조됐던 때다. 미 연준은 2019년 7월을 시작으로 9월, 10월 등 세 차례에 걸쳐 각각 0.25%포인트씩 금리를 내렸다. 당시에도 세계 증시는 첫 번째 금리 인하 뒤 3개월 동안 약 3% 안팎 상승세를 보였다. 금리 인하 뒤 2020년 2월 코로나바이러스 발발로 세계 경제가 극단적인 침체를 겪었다는 점은 지금과 구분된다.
박상현 iM증권 애널리스트는 “2019년 당시 연준의 금리 인하는 경기와 주식 시장 상승 촉매제로 작용했다”며 “금리 인하가 경기 경착륙의 방어막이면서 AI 캐즘 우려를 완화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분석했다.
단기채 발행 → 증시 유동성 공급
정치경제학적 시각에서 이번 금리 인하와 미 대선을 결부시켜 세계 증시 단기 랠리를 점치는 시각도 있다. 금리 인하 국면에서 미 재무부가 국채 이자 부담을 낮추려 장기채보다 단기채 발행을 늘리는 게 유동성 공급으로 이어져 증시 단기 랠리가 나타날 수 있단 논리다. 특히 미 대선 직전 증시가 강세를 보일 때는 통상 집권당에 유리한 판세가 펼쳐졌다는 통계도 존재한다. 미 정치권에서 공화당 주도로 이번 금리 인하와 결부시켜 미 재무부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은 배경이다.
최근 미 정치권에서는 공화당을 중심으로 재닛 옐런 재무부 장관을 두고 ‘슈거 하이(Sugar High)’를 하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다. 슈거 하이는 당분이 높은 음식을 섭취하면 단기적으로 활력이 제고되는 현상을 뜻한다.
공화당 측은 재닛 옐런 재무부 장관이 장기 국채 발행 규모를 인위적으로 줄여 금리를 낮추고, 이를 통해 집권당인 민주당에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려 한다는 주장을 편다. 단기채 중심 국채 발행은 세계 금융 시장에 유동성 공급을 늘리는 효과를 낳는다. 채권은 듀레이션(평균적인 투자 만기 기간)을 따라 금리 변동폭에 따른 가격 변화가 다르다. 듀레이션이 긴 장기 채권은 금리에 민감하므로 가격 변동성이 크다. 반대로 듀레이션이 짧은 단기 채권은 금리에 상대적으로 덜 민감해 가격 변동성이 낮다. 변동성이 낮은 단기채는 장기채 대비 담보 가치가 높아 100%에 가까운 LTV(담보인정비율)로 레버리지를 일으킨다. 이 때문에 시장에서는 금리 인하 국면에서 단기채 발행마저 늘릴 경우 시장에 유동성을 과다 공급하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또한 금리가 상대적으로 비싼 단기 채권 위주로 국채를 발행하면 장기 국채가 희소해지고, 장기 국채 이자를 낮추는 결과를 불러온다. 이 점이 ‘슈거 하이’를 비판하는 논리다.
미 재무부 입장에서는 ‘슈거 하이’라는 비판에 직면하더라도 장기채 금리가 낮아지기 전까지는 이런 전략을 쓸 것으로 시장은 전망한다. 미 정부 부채는 대부분 장기채다. 제아무리 기축통화국이라 해도 지금의 미 정부 부채를 감당하려면 국채 이자를 내는 데 예산을 모두 소진해야 할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하다. 달러를 찍어 이자를 내더라도 이는 약달러와 강력한 인플레이션이라는 후폭풍에 직면할 수 있다. 단기채 발행에 따른 유동성 과잉 공급 우려에도 불구하고 미 재무부가 섣불리 장기채 발행을 늘리는 쪽으로 선회하기 힘든 이유다.
미 재무부가 단기채 발행을 늘리는 것을 미 대선과 연결 짓는 시각도 있다. 미 투자전문기관 CFRA의 샘 스토볼 수석 투자전략가가 내놓은 예측 모델에 따르면, 대선 직전 3개월(7월 31일~10월 31일) S&P500지수 상승 땐 집권당이 승리하고 지수 하락 땐 정권이 교체된다. 신용평가사 S&P글로벌이 상관관계를 분석한 결과도 다르지 않다. S&P글로벌에 따르면, 1944년부터 2020년 사이 치러진 20번의 대선 가운데 스토볼 예측 모델은 17번 적중했다. 로널드 레이건 미 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했던 1984년 대선 이후에는 적중률 100%를 자랑한다. 결국 단기채 발행이 증시 유동성을 늘리는 효과를 낳고, 이런 거시경제 환경이 현 집권당인 민주당에 유리하게 작용할지를 두고 미 정치권에서 날 선 공방이 벌어지는 것이다.
엔 캐리 청산 등 복병도 여전
HBM 등 AI 버블 경계감도
증시 변동성을 자극할 복병도 적지 않다. 시장에서는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 우려가 다시 고개를 든다. 9월부터 미 리 인하가 본격화한 데다 최근 일본은행(BOJ)이 연내 최소 한 차례 더 금리를 올릴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엔 캐리 트레이드는 금리가 낮은 일본에서 돈을 빌려 금리가 높은 국가에 투자하는 차익 거래의 한 종류로, 최근 세계 증시 변동성 확대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국제금융센터는 최근 ‘글로벌 주요 리스크’에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을 새로 편입했다. 김위대 국제금융센터 경제리스크분석부장은 “추가적인 미·일 금리차 축소와 엔화 강세 등이 예상돼 피투자국(엔화를 빌려 투자한 국가) 자산 시장에서 포트폴리오 조정 수요가 증가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실제 엔 캐리 트레이드 규모는 지표상 집계치보다 클 수 있으며 50% 이상 청산 주장은 다소 과장됐다고 본다”며 “역사적 수준에서 엔화가 저평가 상태인 점을 고려하면 향후 1~2년간 청산은 지속될 것”이라 봤다.
세계 금융 시장에서 AI 산업 ‘버블’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는 점도 변동성 확대 요인으로 지목된다. AI 가속기 GPU와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AI 인프라 설비투자(CAPEX)는 눈덩이처럼 불어나지만, 최종 수요 시장에서 그 이상 매출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최근 미국 IB 모건스탠리가 잇따라 내놓은 보고서는 반도체 ‘피크아웃’ 우려에 불을 지폈다. 모건스탠리는 지난 8월 ‘반도체 업황 피크를 준비하라(Preparing for a peak)’는 보고서를 발간한 데 이어 최근에는 ‘겨울이 곧 닥친다(Winter looms)’는 보고서도 냈다. D램 업황이 올 4분기(10~12월) 고점을 찍은 뒤 2026년까지 공급 과잉에 시달릴 것이며 HBM도 공급 과잉 가능성이 높다는 게 보고서 주장이다.
[배준희 기자 bae.junhee@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77호 (2024.09.25~2024.10.0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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