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요리사'에 나온 혁명적 메뉴, 재료 알면 더 놀랄걸요
[이현우 기자]
비건 지향인으로서 요리 프로그램을 볼 때 다소 불편한 장면이 있다. 동물의 살점과 뼈를 요리의 재료로 다루는 모습이다. 특히 예능 프로그램은 유머랍시고 동물을 희화화하는 장면은 불편하다. 이러한 콘텐츠 환경 때문인지 내게 요리 경연 프로그램은 관심 밖이었다.
그런데 며칠 전 아내가 요리 경연 프로그램에서 나온 비건 요리와 요리사가 온라인상에서 화제라고 말했다. 비건 요리라니, 놀랍기도 하면서 자연스레 관심이 생겼다.
▲ '흑백요리사' 속 한 장면 |
ⓒ 넷플릭스 |
바둑에서 둘 중 기력이 낮은 이가 흑을, 기력이 높은 이가 백을 잡는다. 바둑처럼 백수저는 이미 이름이 널리 알려진 공인된 유명 요리사다. 이름만 대면 일반인도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이들이다.
심사위원으로 있어도 어색하지 않을 요리계 대가도 출연했다. 중식대가 여경래, 백악관 국빈만찬 요리사 에드워드 리, 요리 경연 프로그램 심사위원으로 출연한 바 있는 최현석 등이다. 미슐랭 1스타를 받은 요리사도 다수 출연했다. 또 <마스터 셰프 코리아 2> 우승자 최강록, <한식대첩> 우승자인 이영숙도 백수저다. 반면 흑수저는 이른바 '재야의 고수'다. 무명이지만 인기 음식점 요리사, 요리 유튜버 등이 출연한다.
첫 번째 경연은 흑수저 결정전이다. 백수저는 첫 경연의 부전승이며, 흑수저 80인 중 20인을 선발한다. 선발된 20인의 흑수저가 백수저와 경연할 기회를 얻는다. 세트장 1층은 흑수저가 음식 경연을 하는 장소로 조성했고, 2층에는 스탠딩 관람석을 마련해 백수저 출연자들이 흑수저 참가자가 요리하고 평가받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했다.
반전 메뉴 '비건 사시미'
<흑백요리사>에는 국내 채소 요리 일인자로 소개된 남정석 요리사도 백수저로 참가했다. 그가 선보일 비건 요리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시청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순간 다른 요리사의 비건 요리를 보게 됐다. 2화가 끝나갈 무렵 흑수저 결정전이 진행되는 도중 비건 요리가 등장한 것이다. 흑수저 '셀럽의 셰프'의 요리였는데, 요리의 대가라 할 수 있는 백수저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재료 준비 시간에 고기가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 '흑백요리사'에 등장한 베지터블 사시미 |
ⓒ 넷플릭스 |
안성재 심사위원이 '셀럽의 셰프' 요리를 평가하는 모습을 많은 백수저 요리사들이 지켜봤다. 흑수저 결정전에서 심사위원의 평가를 보는 것도 흥미롭지만, 요리에 나름 내공이 있는 백수저의 반응과 표현을 듣는 것도 묘미가 있다.
백수저 출연자 선경은 "돈 주고 사 먹고 싶은데"라고 말했고, 지켜보던 에드워드 리도 "맛보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최현석은 "비트 익힌 거랑 아보카도랑 같이 있잖아요. 오도로(참치 뱃살)처럼 (비트는) 기름 맛이 약하니까. 일리가 있는 거지. 되게 똑똑하네요"라고 했다.
드디어 안성재 심사위원이 맛을 봤다. 눈을 감고서 음미했고 모두가 숨죽여 평가 순간을 지켜봤다. 결과는 생존. '셀럽의 셰프'는 아이처럼 뛰며 기뻐했다. 가짜 사시미가 진짜 미식으로 인정받는 순간 같았다. 안 심사위원은 "셀럽의 셰프가 별다른 설명 없이 '눈을 감고서 맛보라'는 말이 본인에게 자유를 줬다"면서 "이를 통해 요리사가 의도한 바가 그대로 구현됐다"고 말했다.
비건 요리는 '가짜'가 아니다
대체육이나 비건 사시미와 같은 요리를 비판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태어나서 성인이 될 때까지 고기에 길들여진 입맛을 거부하고 동물권, 환경 등을 이유로 채식을 지향하려는 이들에게는 '가짜 고기'는 간절할 것이다. 이렇게라도 동물을 덜 죽일 수 있다면 이야말로 밥상 혁명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비건 요리에 가짜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건 부당하다. 가짜가 아니라 진짜다.
실제로 비건 요리는 날로 발전하고 있다. 필자가 <흑백요리사>를 통해 비건 사시미를 처음 본 건 아니었다. 약 6년간 비건 지향인으로 살면서 몇 차례 비건 사시미와 비건 스시(초밥)를 맛봤다. 비건 스시는 사시미를 최대한 유사하게 구현했다는 점에서 놀라움을 안겨줬다. 스시를 구현한 요리사에게 박수를 보내는 게 마땅하다.
이뿐만이 아니다. 비건 뽀모도로 파스타, 비건 유린기, 비건표고탕수 등 채소 기반의 다양한 비건 요리를 시중에서 먹을 수 있다. 지금은 운영이 중단됐지만 서울 잠실의 한 식당에서 먹었던 비건 감자탕은 잊을 수 없다.
▲ '흑백요리사'에서 비건 요리를 선보인 '셀럽의 셰프' |
ⓒ 넷플릭스 |
동시에 꼭 비건 음식이 아니어도 채소를 비롯한 비건 재료를 활용하는 다양한 방법도 참고할 만하다. 같은 식재료라도 어떻게 활용하는지에 따라 다채로운 음식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목격하면서 좀 더 맛있는 비건 요리를 시도해 보는 상상을 해보게 된다.
<흑백요리사>에는 예상치 못한 깊은 요리의 세계가 담겨있다. 완성된 접시 하나에 올려진 메뉴에서 철학과 예술, 그리고 성실한 요리사의 삶이 그려진다. 칼질을 몇 번이나 반복하며 불을 다루고 식재료를 배합했겠는가. 얼마나 많은 실패를 거듭하면서 스스로 만족스러운 요리에 이르렀겠는가. 필자처럼 요리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이도 긍정적인 자극을 받게 될 것이다. 만약 당신이 맛 때문에 비건 되기를 포기한 자라면 새로운 용기를 얻을지도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brunch.co.kr/@rulerstic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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