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여만에 출감, 고향에서 농삿일

김삼웅 2024. 9. 24.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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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조문학의 큰별 가람 이병기평전 11] 어디에서도 희망의 빛은 보이지 않았다

[김삼웅 기자]

 가람 이병기 선생 생가
ⓒ (주)CPN문화재방송국
일제 말기 이땅의 지식인들은 지극히 불행했다. 온갖 회유와 탄압에도 민족적 양심을 지켜온 그들에게 불어닥치는 현실은 감당하고 판단하기 쉽지 않았다. 일제는 욱일승천하는 모습이고 국내의 민족운동은 맥이 끊어지다시피 하였다. 이때까지 지절을 지켜왔던 인사들이 친일의 대열에 합류했다.

어디에서도 희망의 빛은 보이지 않았다. 1943년 1월 징병제 실시에 이어 10월 학병제가 실시되고 전문학교·고등학교 재학생 중 학도병에 지원하지 않는 학생에게 징용 영장이 발부되었다.

총독부 산하 중추원은 학도병에 지원하지 않는 학생은 강제로 휴학시켜 징용하기로 결정했다. 가람의 장남도 끌려갔다.

가람은 투옥 1년여 만인 1942년 9월 15일 기소유예로 함흥형무소에서 출감하여 다음 날 서울 계동의 집으로 돌아왔다. 육신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옥사한 분들과 여전히 옥고를 치르고 있는 동지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은 어찌하기 어려웠다.

감시와 유혹으로 서울생활을 감당하기 쉽지 않았다. 일제는 남아 있는 민족주의 계열 인사들에게 '망치와 빵'을 내밀었다. 이때 지은 <살풍경>이란 시조다.

갊아 두었던 붓이 거의 다 좀이 먹고
난은 향을 잊고 수선도 자취 없고
상머리 거문고 마저 귀가 절로 어뢰라. (주석 1)
 가람 이병기 선생 동상
ⓒ (주)CPN문화재방송국
그는 암담한 서울 생활을 접고 가족과 함께 귀향을 결정했다.

그러나 살 수가 없어 그 이듬해 집을 팔고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 천 여원 주고 샀던 집을 9천여 원을 받았으니 퍽 이된 듯하다. 세금으로 떼고 또 진 빚들을 갚고 나니 여비나 될까말까 한다. 이삿짐은 트럭으로 실었는바 낡은 책뿐이었다. 가르쳤던 중학 졸업생들이 와 짐도 싸주고 트럭도 주선해 주었다.

나는 일생 교사질로 퍽 단순한 생활을 계속해 왔으나 집에 있든지 어디 가든지 그 재학생 또는 졸업생들이 가지가지 편의를 많이 보아 준다. 나는 성질이 본시 덤덤하여 재미있게 다정스럽게도 대하지도 않았건만 그렇게 나를 따르고 도와주는 일은 알 수가 없다.

고향으로 간 뒤 책은 방에 쌓아두고 논밭으로 돌아다니며 지게질 외에는 아니한 일이 없다. 농사도 지어 보니 또한 편한 일이 아니다. 봄·여름·가을만 바쁜 것이 아니라, 겨울도 새끼를 꼬거나, 구력을 만들거나, 벼를 비벼 자리를 치거니 하자면 잠시도 한가할 겨를이 없다.

이렇게 피땀을 흘리고 지어 놓은 그리 많지도 않는 곡식을 공출로 거의 다 빼앗기고, 자식은 징병으로 빼앗기고, 하루에 죽 한 그릇씩을 먹고 여러 식구가 겨우 연명하였었다. (주석 2)

대량 훼절의 시기에 깨끗하게 몸을 지킨 분들도 없지 않았다. '친일파 연구의 선각자'로 불리는 임종국은 <친일문학론>에서 가람에 대해 "끝까지 지조를 지키며 단 한 편의 친일문학도 남긴 일이 없는 영광된 작가"라고 썼다. 그의 개결한 민족정신과 반일의 의지가 배인 결과인 것이다.

한 연구자는 가람의 민족의식과 관련 이렇게 서술한다.

이병기는 주시경의 국권회복운동의 노선을 계승하겠다는 의사를 <주시경선생 인상기>와 <한힌샘 스승님>과 <주시경선생의 묻엄>과 <말과 글>과 <나의 한 돌이켜 생각나는 옛날>이라는 글에서 밝혔다. 이처럼 그에게 주시경은 인생의 나침반과 같은 존재였다.

동시에 그의 민족의식의 형성에는 단군을 숭배하는 민족종교인 대종교의 영향도 작용하였다. 1920년 이병기는 권덕규와 교유하며 11월 13일 대종교가 주최하는 강연을 들었다. 11월 21일 대종교가 주최한 강연을 들은 뒤, 일기에 그는 우리 민족이 단군의 가르침을 알아야 한다고 기술 하였다. 이후 대종교를 수용하였다. (주석 3)

누구라도 고향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만은 그의 고향사랑은 남달랐다. 불의의 시대에 자신을 지키고자 택한 곳이 고향이었다. '고향' 관련 여러 시조 중에 <고향길에>를 골랐다.

고향길에

소매속 드는 바람 시원도 하온지고
나를 따라 저 달은 물에 비쳐 보이다가
내 또한 산을 넘으니 산 넘어서 보이더라

벼포기 묶어 센 듯 두렁 너머 우뚝 솟고
콩과 팥은 넝쿨 벗어 길도 밭도 모를세라
해마다 저녁 이슬에 옷을 적셔 드노라

모처럼 집에 드니 낯선이도 많은지고
술 받고 닭을 잡아 손과 같이 여기오며
이웃집 늙은이들도 수스러이 아더라

뒷동산 깊은 숲에 흐르는 꾀꼬리 소리
하두나 좋을세라 춤을 추고 일어나니
산듯한 아침 햇발이 산을 넘어오더라

선경이 이 아닌가 달리 찾아 무엇하리
대 숲속 맑은 바람 돌사이 맑은 시내
홍진에 흐렸던 가슴을 씻어 준 듯하여라. (주석 4)

그의 가족사에 큰 비극이 닥쳤다. 큰 아들 동희가 징용에 끌려가고 해방이 된 후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아들을 생각하고 (1)(2)>라는 시조를 지어 어버이의 못다한 정을 담았다.

아들을 생각하고(1)

벌써 돌이 되어도 돌아를 아니온다
말자 말자 하여도 생각이 절로 난다
성한 듯 썩는 맘이야 누가 알아보리오.

아들을 생각하고 (2)

밤중에 일어 앉아 이렇게도 생각난다
과연 죽었는가 죽어 다시 살아올까
그래도 바라는 마음 바늘귀처럼 트인다. (주석 5)

주석
1> <가람문선>, 58쪽.
2> 앞의 책, 204쪽.
3> 박용규, <이병기, 우리의 생명인 우리말을 지키자고 역설했다>, <조선어학회33인>, 186쪽, 역사공간, 2014.
4> <가람문선>, 79쪽.
5> <가람문선>, 97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조문학의 큰별 가람 이병기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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