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지는 머리칼에 깊어지는 글 [조남대의 은퇴일기(61)]

데스크 2024. 9. 24.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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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마치 바람처럼 보이지 않는 속도로 우리의 삶을 스쳐 지나간다. 그 속에서 몸은 점차 변해가고 머리는 가장 먼저 흔적을 남긴다. 잎이 떨어지듯 머리카락은 점차 사라지고 그 빈자리는 생각과 고민으로 채워진다. 나이 듦이란 어쩌면 자연이 나에게 보내는 손편지 같아서 그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 흩어지는 머리칼에 대한 고민은 접어두고 이제 글 속에서 나를 발견하는 시간을 가지련다.

어느 날 화장실 거울에 비친 정수리가 허전해 보였다. 무심코 넘기려다 다시 바라본 그 자리는 예전 같지 않았다. 밀도가 엷어 진 머리는 세월을 은밀히 속삭이는 듯하다. 샤워 중에 떨어진 머리카락 뭉치가 오십 가닥은 되는 것 같다. 사람마다 어느 정도는 빠지기 마련이지만 요즘 들어 자꾸만 눈에 들어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걱정이 앞선다.

정수리부분의 머리 숱이 헐빈해진 모습

'이러다가 대머리가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아들네가 왔을 때 이야기를 꺼냈다. 며느리는 천연샴푸를 사 주고 아내는 탈모에 좋다는 영양제를 챙겨주는 등 관심을 보인다. 샴푸와 영양제를 꾸준히 써 봤지만 나아지는 기미는 느껴지지 않는다. 아직도 활동하고자 하는 마음은 왕성한데 머리칼이 듬성듬성해져 나이 들어 보일까 염려스럽다. 머리 주변 머리카락이 빠지면 '주변머리가 없다'라고 하고, 정수리 쪽이 비면 '소갈머리가 없다' 라는 말이 있다는데 나는 이대로 소갈머리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닐는지.

며느리가 구입해 준 천연삼푸
머리 마사지 기구

탈모의 원인을 찾아보니 스트레스, 영양 결핍, 두피 질환, 화학적 손상, 약물 부작용 그리고 유전적 요인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 곰곰이 따져 본다. 다른 요인은 딱히 내 겐 해당하지 않는 듯하지만 어쩌면 수필을 쓰느라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있으면서 받은 스트레스나, 염색으로 인한 화학적 손상이 원인일지도 모르겠다. 아내의 권유로 염색을 한 지도 오래다. 흰 머리카락이 보이기 무섭게 의자에 앉히고 염색약을 바르는 아내의 손길이 고맙건만 빈번한 염색이 내 머리카락을 더 취약하게 만들지는 않았을까. 수필을 연재하기 위해 컴퓨터 앞에서 글을 쓰다 보면 생각이 깊어지고 그로 인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머리에 부담을 주는 것이 아닐까. 마치 머리칼이 하나 둘 흩어지는 것은 생각과 마음이 세월의 흐름 속에서 잃어버리는 것들을 상징하는 듯하다.

불안한 마음에 인터넷을 검색하여 집 부근의 피부과를 찾았다. 탈모를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의원이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갔지만 제시한 금액이 적지 않다. 미용 목적이라 건강보험 혜택도 받을 수 없는 탓이겠지만 예상보다 비싼 금액에 잠시 망설여진다. 그러나 치료 전후의 사진을 보여주며 설명하는 의사의 말에 솔깃하여 보통 6개월에서 9개월 정도 치료하는데 일단 3개월만 해 보기로 했다. 일주일에 한 번 병원을 방문해 머리를 감고 레이저 치료를 받은 뒤, 두피에 약물을 주사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주사기로 머리를 찌른다는 생각에 처음에는 등골이 오싹했지만 풍성한 머리 모습을 상상하니 견딜 만했다. 처방받은 약도 두 종류나 되고 한 달쯤 지나자 머리칼이 덜 빠지는 것 같아 안심되었다.

삼 개월 치료가 끝나갈 무렵 미국 딸네 집을 방문할 일이 생겨 두 달 치 약을 받아 떠났다. 상쾌한 공기 속에서 별다른 걱정 없이 여행을 다녀서인지, 그동안의 치료 덕분인지 머리칼 빠지는 것이 훨씬 줄어들었다. 그 이후로 더는 치료를 이어가지 않았고, 탈모에 대한 걱정도 서서히 멀어졌다. 약을 먹자 얼굴이 붉어지며 열이 오르는 등 부작용이 나타나고 신장에 무리가 갈 수 있다는 경고도 있어 은근히 걱정되기도 했다. 젊었을 때는 빨랫비누로 머리를 감고도 머리카락이 굵고 숱도 많아 이발할 때는 솎아내야 할 정도였다. 워낙 뻣뻣하여 구둣솔을 만들어도 될 것 같았는데 '세월 앞에 장사 없다'라는 말을 실감하듯 머리칼은 점점 빠지고 얇아짐에 따라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느끼는 것은 머리칼 하나하나가 내 삶의 시간과도 닮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샤워하다 바닥에 남겨진 머리카락을 보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우울해 지기도 한다. 빛이 반사될 정도로 반들거리는 대머리가 상상되어서다. 그렇다고 탈모를 걱정해 염색을 포기하거나 스트레스 때문에 글쓰기를 멈출 수는 없다. 요즈음엔 염색에 파마까지 했더니 훨씬 젊어 보이고 인상도 부드러워 보인다는 반응이다. 문인처럼 잘 어울린다는 이야기에 한결 마음이 가볍고 기분도 좋다. 인상이 바뀔 정도로 탈모가 진행된다면 모자를 쓰면 그만이고 더 심해지면 가발도 마다하지 않을 생각이다. 얼마 전 머리가 훤하던 친구를 만났는데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사업상 사람들을 많이 만나야 해서 탈모로 나이가 더 들어 보이고 인상도 좋지 않아 가발을 썼다고 한다. 이런 좋은 해결책이 있는데 더는 탈모에 신경 쓰지 않고 글 쓰는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려 한다.

동네 미용실에서 파마하고 있는 작가

이제 글쓰기는 일상의 한 부분이고 삶 자체다. 글을 쓰지 않는다면 삶은 텅 빈 껍데기처럼 느껴질 것이다. 책상 위에 펼쳐진 노트북 화면에 한 자 한 자 써 내려가는 글귀는 단순한 문장 이상이다. 그 속엔 나의 마음과 영혼이 깃들여 있고 글을 쓰는 동안 나의 감정과 생각이 자연스럽게 정리되고 새로운 세계를 탐험한다. 글쓰기로 얻는 행복감은 탈모에 대한 우울을 단숨에 뛰어넘는다. 탈모는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변화이거니 하며 담담히 받아들이려고 한다. 글쓰기에 몰두하며 겪는 스트레스는 어쩌면 기꺼이 치러야 할 대가일지도 모른다. 나의 귀중한 걸 희생하지 않고는 소중한 것을 얻을 수 없다는 등가교환의 법칙을 다시 확인한다. 대머리가 된다고 해서 글쓰기를 멈추거나 삶이 무너질 리 없다.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와 깊은 사유를 담아 나의 존재를 글 속에 심고 나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동네 카페에서 노트북을 펼쳐 놓고 작업하는 작가

프랑스 속담에 '그의 이마가 넓을수록 지혜롭다'라는 말이 있다. 탈모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그 안에서 자신감을 찾으라는 뜻이 아닐까 싶다. 탈모를 커버할 방법이 많으니 하고 싶은 일에 열중하며 제2의 인생을 멋지게 살아가리라. 나이 듦이란 어쩌면 탈모처럼 나를 변하게 하지만 그 변화 속에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시간을 갖게 하는 것 같다. 머리카락이 빠질 때마다 새로운 문장을 얻고 삶은 더욱 풍성하게 채워질 것이다. 머리에 가득 찬 탈모 걱정을 말끔히 쏟아 비우고 그 빈 공간을 창작의 열기로 채우면 내 삶은 빛과 만나고 밝음과 손잡지 않을까.

조남대 작가ndcho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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