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청송 지역 국권회복의 보루 산남의진
[정만진 기자]
▲ 영천호(예전 이름 '자양댐) 굽이도는 길에 세워져 있는 산남의진 기념비 |
ⓒ 정만진 |
의관으로서 자신의 건강을 오랫동안 보살펴온 정환직에 대한 고종의 신임은 각별했다. 정환직은 성총을 입은 데 감격해 그날 즉시 고향 영천에 있는 아들 정용기를 서울로 불렀다.
고종의 "창의" 밀지를 받은 정환직, 즉각 실행 돌입
정용기는 환갑 진갑을 다 지난 아버지가 무슨 큰 발병이나 하였나 걱정에 사로잡혀 부랴부랴 상경했다. 그런데 아들을 맞는 아버지 정환직은 병색은커녕 얼굴빛이 도화색으로 상기된 채 힘이 넘치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내 나이 예순셋으로 상늙은이가 되었다(1843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63세이다). 국가 사직이 존망의 위태로움에 빠진 이때, 임금께서는 어찌 나를 믿으셨는지 만고의 충신이 되라 하시는구나. 가없는 가문의 영광이 도래했지만, 나는 이미 늙어 무엇을 어떻게 해야 옳은지 제대로 가늠이 안 된다. 이를 어쩌면 좋으냐? 우리 부자가 앞으로 진력해서 할 일을 젊은 네가 궁구해 보았으면 한다."
이때 정용기의 나이 마흔넷이었다(1862년생). 아들이 답을 올렸다.
"왜놈들에 대한 분기탱천으로 금수강산이 가득 찼습니다. 의사들이 각자 고향에서 군사를 일으킬 것은 자명합니다. 다만 그들이 전국 방방골골에서 각개전투를 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한날 한시에 서울로 집결해 왜놈들을 도성에서 몰아내어야 국권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정환직이 무릎을 탁 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참으로 좋은 방략이로다!"
영천으로 돌아온 정용기는 1906년 1월 4일 오랜 벗 이한구와 손영각, 육촌동생 정순기와 창의 방안을 숙의했다. 정용기가, 아버지 정환직이 임금으로부터 창의 밀지와 군자금 5만 냥을 받은 사실(권영배, <정환직 정용기 양세 의병장>)을 전하면서 "아버지께서 서울에 머무시면서 우리들을 후원해 주시기로 하셨다네"라고 말하자 모두들 고무되어 낯빛이 환하게 피어났다.
임금이 지켜보고 있다는 말에 의병 동참자들 크게 고무
네 사람이 중심이 되어 시작한 의병 모집은 아주 순조롭게 진척되었다. 창의에 동참하라는 격문을 만들어 주요 문중마다 전달하고, 이한구와 이규필이 청송 지역과 흥해 지역을 직접 순회하며 모병 활동을 펼치고, 인근 영릉의진(신돌석 의병장)을 방문해 상호 협조방안을 논의한 것이 특효를 보았다.
산남의진은 석 달 만에 1000여 군사를 가진 대단한 의병군이 되었다. 산남의진(山南義陣)은 영남의 의병 부대라는 뜻이었다. 산남의진은 대장 정용기, 중군장 이한구, 참모장 손영각, 소모장 정순기, 도총장 이종곤, 선봉장 홍구섭, 후군장 서종락, 좌영장 이경구, 우영장 김태언, 연습장 이규필, 도포장 백남신 등으로 포진되었다.
서울로 진격하려던 산남의진, 끝내 성공 못하고
산남의진은 영해 지방의 신돌석 의병부대를 후원하는 한편 관동 지방을 거쳐 서울로 진군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일본군과 여러 차례 교전, 이기고 지기를 반복한 끝에 결국 1907년 10월 죽장 입암 전투에서 대장 정용기를 비롯한 장령 다수가 전사하는 피해를 입고 말았다.
아버지 정환직이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내려와 죽은 아들을 대신해 의병대장을 맡았다. 하지만 그 역시 1907년 12월 순국했다. 그 후 산남의진은 청송, 팔공산 등지에서 1908년 7월까지 유격전을 지속했으나 1908년 7월 제3대 의병대장 최세윤이 붙잡히면서 사실상 해체되었다.
아들에 이어 의병대장을 맡은 아버지의 순국
1942년 9월 24일 정치화 지사가 세상을 떠났다. 의병에 투신한 1906년 당시 39세였으니, 그 시절로서는 청년이랄 수 없는 나이였다.
영천시 자양면 용산리 947번지가 본적인 정치화 지사가 산남의진에 가담한 것은 지리적으로 볼 때 당연한 일이었다. 산남의진은 영천에서 결성되었다. 혈연적으로도 자연스러웠다. 정치화(鄭致化) 지사는 산남의진 초대 의병대장 정용기(鄭鏞基), 그리고 아들(정용기) 전사 후 제2대 의병대장을 맡은 정환직(鄭煥直)과 한 가문(12촌)이었다.
산남의진 영천 지역 책임자 정치화 지사
산남의진은 결성 때 각 지역별로 본부와 연락을 주고받고 민병을 모집할 책임자를 두었다. 정치화는 영천 지역 통모자(通謀者)였다. 지사는 지휘부의 계획을 영천 지원 후원자들에 전달하고 물자와 군사를 모아 본부로 보내는 일에 공헌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정치화 지사보다 28년 하루 뒤인 1970년 9월 25일, 역시 산남의진에서 활동한 남정철(南井喆) 지사가 별세했다. 1867년생인 정치화 지사는 독립을 못 보고 그 3년 전인 1942년에 75세로 세상을 떠났지만, 정 지사보다 21년 늦게(1888년) 태어난 남 지사는 그보다 28년 후 향년 82세로 타계했다.
두 분 모두 천수를 누렸지만 삶은 너무나 고단했다. 산남의진에서 활동했으니 더 설명할 것도 없지만, 남 지사는 해방정국의 혼란과 남북상잔의 전쟁,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정권까지 겪었다.
독립도 보았지만 전쟁과 독재까지 보고 만 독립지사
그는, 같이 산남의진 활동을 했던 4년 연상 우재룡 지사가 죽음을 앞둔 1955년 3월 정환직·용기 부자 의병대장 묘소에 참배를 와서 "독립이 되었다고? 독립지사는 보도연맹을 피해 산에 숨어살고, 친일파는 떵떵거리며 활개를 치는 세상인데, 그래도 독립이 되었어? 허튼 소리 그만들 하시오. 진정한 독립은 통일이 되어야 이루어지는 것이오!" 하며 땅을 치는 울음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남 지사의 본적은 영천과 인접한 청송 현동면 개일리 113번지이다. 산남의진이 결성될 때 18세였던 남 지사는 영천으로 와서 종사(從事)에 임명되었다. 적의 형세를 수색해 본진에 보고하는 임무를 주로 수행했으니 요즘 말로 하면 정보참모부 소속이었다.
그가 영천으로 남하할 때 김태언·김종락·남석우·남석인·남석현·오상영·조태초 등 상당수 청송사람들도 함께 내려와 산남의진에 들었다. 이들 중 정환직 의병대장 순국 후에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1908년 2월 이래 청송으로 귀환해 유격전에 돌입했다.
정환직 의병대장 순국 후 고향 청송에서 유격전
주왕산을 중심으로 청송읍·부동면·부남면 일원의 청송 동부 지역은 서종락 부대, 철령 일대 청송 서부 지역은 남석구 부대가 활동했다. 서종락 부대는 대장 서종락을 중심으로 중군 우영조, 소모장 윤용식, 군문집사 조경옥, 참모장 심일지, 도총 오상영, 도포장 심지국 등으로 편성되었는데 남정철 지사는 여기서도 종사를 맡았다.
1910년 고와실 전투를 끝으로 청송 지역 의병 부대는 해체되었고, 조선은 일본제국주의 치하에 들어갔다. 아직 22세 열혈청년이던 남 지사는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덧붙이는 글 | 국가 인정 독립유공지가 1만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는 1500년 이상 걸립니다. 한 달에 세 분씩 소개해도 500년 이상 골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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