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대안정당 자격 의심케 하는 황당무계 계엄 음모론

2024. 9. 24. 00:4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민주화 이후 군의 정치 개입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어본 건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2003년 봄이 처음이었다. 학술 세미나 자리였는데, 발표, 토론이 끝난 후 한 청중이 불쑥 질문했다. “노무현 때문에 나라 꼴이 말이 아닌데 군은 안 나오고 뭐 하는지 모르겠다.” 당시 세미나 주제와도 맞지 않는 엉뚱한 말에 회의장 분위기가 어색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청중들이 폭소를 터뜨렸고 그걸로 사태는 마무리됐다.

「 여야 대표회담서 계엄 가능성 언급
이재명 대표 진짜 그렇게 믿는 걸까
1980년과 지금의 한국 구분 못 하나
군 통수권자 될 수 있는지 회의 들어

지난 1일 열린 국민의힘-더불어민주당 당 대표 회담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김성룡 기자


20년 전에도 터무니없게 들렸던 말을 오늘날 거대 야당 대표에게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어렵사리 성사된 정당 대표회담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계엄 이야기가 자꾸 나온다”고 했고 더 나아가 “계엄 해제를 국회가 요구하는 걸 막기 위해 계엄 선포와 동시에 국회의원을 체포, 구금하겠다는 계획을 꾸몄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했다. 대표회담을 통해 정치적 돌파구라도 만들어낼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는데, 이 발언을 듣고 솔직히 내 귀를 의심했다. 이 대표가 말한 대로, 계엄을 선포하고 국회의 해제 요구를 막기 위해 정치인들을 잡아넣었던 불행했던 사태는 1980년 5월 17일이 마지막이었다. 신군부의 권력 장악을 위한 쿠데타였다. 민주화된 대명천지에 국회를 좌지우지하는 야당 대표가 친위 쿠데타의 가능성을 언급한 것이다. 기회 있을 때마다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강조해 온 윤석열 대통령이 그런 ‘어마어마한 쿠데타’를 도모하려 했다는 것도 믿기 어렵지만, 무엇보다 그 일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이 대표를 비롯한 민주당 사람들의 발상이 가히 충격적이다.

민주화 이후 지난 30여 년 동안 우리는 민주주의를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발전시켜 왔다. 정치화된 군부의 퇴진도 민주화 초기에 김영삼 대통령이 해결했다. 법과 절차에 의한 권력 교체의 원칙도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이 때문에 민주주의를 평가하는 외국의 여러 기관으로부터 한국은 민주주의가 공고화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공고화되었다는 것은 이전 상태로 회귀할 가능성이 대단히 낮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대표의 발언은 군을 정치적으로 동원해서 야당을 탄압하는 과거의 권위주의 통치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1979년 12월 12일 서울에서 일어난 신군부 세력의 반란을 막기 위한 일촉즉발의 9시간을 그린 영화 '서울의 봄'의 한 장면.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이 발언을 들으면서 민주당은 과연 어느 시대에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980년의 전두환은 계엄 확대와 함께 군사력으로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지만, 1987년의 전두환은 정치적으로 몰리는 상황에서도 군을 다시 불러낼 수 없었다. 당시 민주화를 향한 국민의 열망이 워낙 강했고, 또 군의 개입을 막으려는 미국의 압력도 거셌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군 내부에서 군사력을 동원한 시위 진압이나 정권 방어에 반대하는 여론이 컸기 때문이다. 광주에서의 비극적 사태는 군으로서도 부끄러운 일이었고 다시는 그런 상황에 빠져들고 싶지 않았다. 그때 전 대통령이 또다시 계엄을 선포했다면, 그 총부리가 자신을 향할 수도 있었다. 이처럼 군이 직접 정치에 개입하는 일은 전두환 정권 후반에도 이미 불가능한 일이었다. 신군부의 리더였던 전두환도 감히 할 수 없었던 일을 민주화된 오늘날의 대통령이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자체가 놀랍다.

그 무책임한 발언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나라를 지킨다는 자긍심과 명예로 살아가는 우리 군에 대한 모욕이기도 하다. 참고로 2020년 한국리서치의 주요 국가 기관 신뢰도 평가에서 군을 신뢰한다는 응답은 41%로 조사 대상 기관 중 가장 높았고, 국회는 9%로 가장 낮았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시민을 연행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 발언을 들으면서 지난 30여년간 세상은 크게 달라졌지만 민주당은 여전히 그 시대에 머물러 있다는 인상을 갖게 됐다. 거기에 정파적 틀에까지 갇혀 1980년의 한국과 2024년의 한국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 것 같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정상회의에 참석하는 수준을 넘어 2차 회의는 미국 등과 공동 주재했고, 올해 3차 회의는 덴마크 등과 공동 주재했다. K팝 등 한국 문화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도 한국 민주주의의 진전과 깊은 관계를 갖는다. 한국 민주주의가 이전으로 후퇴한다면 경제·외교·문화 등 전 영역에서 지금 우리가 국제 사회에서 누리고 있는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다. 계엄령과 같은 상황에 대한 설정이 오늘날 우리 현실과 위상에 전혀 맞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민주당은 여전히 가짜뉴스와 계엄령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번 일을 보면서 이 대표가 군 통수권자가 될 수 있는지, 민주당이 권력을 감당할 만한 대안 세력인지에 대해 회의가 들었다. 윤 대통령이 못한다는 데는 많은 이들이 공감하지만, 그렇다고 민주당과 이 대표가 더 나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높지 않은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지난 대선 때도 그랬다. 정치 초보 윤석열 후보가 마뜩잖았지만, 이재명 후보가 미덥지 못해 마지못해 윤 후보를 선택한 이들이 적지 않았고, 그게 근소한 승패를 만들어냈다. 민주당은 그때의 패배에도 별로 교훈을 얻은 게 없는 것 같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