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초마다 '수조 개' 데이터 입력…볼보가 엔비디아 AI칩 쓴 이유
“EX90은 볼보의 새 시대를 여는 차량이다. 순수 전기차이며, 첨단 장비와 소프트웨어를 완벽히 조합해 안전성을 극대화한 자율주행 기술을 탄생시켰다.”
지난 5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 뉴포트 비치에서 열린 볼보 글로벌 테스트 드라이빙 행사장. 짐 로한 볼보 최고경영자(CEO)가 영상으로 등장해 순수 전기 대형 스포츠유틸리티차(SUV) EX90를 이렇게 소개했다. 볼보는 2022년 11월 EX90을 처음 공개한 뒤, 현재 글로벌 출시를 준비하고 있다.
EX90은 자율주행 시대에 대비한 ‘인공지능(AI) 기술의 총체’라는 평가를 받는다. 볼보 차량 중 처음으로 차량 전면 상부에 라이다(LiDAR)가 탑재됐고, 자율주행 데이터 처리를 위한 ‘두뇌’로 엔비디아 반도체가 들어갔다. 라이다 외에 8개의 카메라, 5개의 레이더, 16개의 초음파 센서 등이 함께 도로 상황을 파악한다.
미카엘 융 오스트 볼보 수석 안전기술 책임은 “EX90은 볼보 차량 중 가장 안전한 모델”이라며 “라이더·카메라 등이 동시에 사물을 인식해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고 있어 (EX90에는) 도로 상황을 파악할 ‘감시자’가 여럿 있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자율주행 3단계’ 핵심기술 적용
라이다와 레이더는 모두 사물과의 거리를 측정해 도로 상황을 인식하는 기술로, 자율주행의 핵심이다. 특히 자율주행 3단계에선 차량이 도로 상황을 파악해 주행하고, 돌발상황 등 필요시에만 운전자에게 조향을 요청하는데 이때 센서의 정확도가 중요하다. 볼보는 자율주행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EX90에 라이다·레이더를 모두 적용했다. 라이다 센서는 광 펄스(갑작스럽고 강렬한 전압·전류 또는 파동) 기반이라 도로 위 물체를 인식하는 정확도가 뛰어나지만, 전파 기반 레이더에 비해 가격이 비싸고 날씨 영향을 받는 단점 때문에 현재 시판 중인 차량 중엔 채택한 차가 거의 없다. 현 시판 차량 중 두 장치가 모두 채택된 차량은 내연기관차인 아우디 A8가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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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비디아 칩, 도로 상황 빠르게 판단
자율주행은 ‘데이터 싸움’이다. 도로 위의 숨겨진 정보까지 읽어내 경우의 수에 포함하고, 이를 빠르게 연산해야 안전성을 보장할 수 있다. 볼보에 따르면, EX90이 주행할 때 매초 수조 개의 데이터가 동시에 입력된다고 한다. 그만큼 강력한 반도체가 필요하단 의미다.
EX90에는 차량 중 처음으로 엔비디아의 시스템온어칩(SoC)이 채택됐다. 탑재된 반도체 2개가 사람의 좌우 두뇌 역할을 한다. ‘재비어’(Xavier)는 매핑(지도화)과 장애물 감지, 경로 계획 알고리즘 처리에 쓰이고, ‘오린’(Orin)은 3차원(3D) 인식, 경로 계획, 장애물 회피, 포즈 예측에 특화돼 있다.
통상 전기신호를 물리 신호로 바꿔야 하는 내연기관차보다, 전기신호만 오가는 전기차가 정밀한 조작이 가능하다. 이 때문에 완성차업계는 전기차와 자율주행의 스텝을 맞추고 있다. 볼보가 순수 전기차인 EX90을 기획하며 자율주행 기술을 대거 포함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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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들엔 자율주행 버튼…“곧 활성화”
볼보는 이미 EX90의 스티어링 휠에 ‘A’라는 자율주행 물리 버튼도 만들어놨다. 크리스티나 엘로슨 볼보 AD&ADAS 선임 프로그램 매니저는 “완전자율주행을 곧 하겠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자율주행이 지금은 완벽하지 않지만 자율주행은 ‘완벽하게 안전’해야 하는 사명이 있다”고 말했다. 볼보의 한 관계자는 2~3년 후면 ‘A’ 버튼이 활성화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EX90의 자율주행 기능이 언제쯤 도로에서 적용될지 현재로선 알 수 없다. 최근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과 유럽 주요 시장의 불황으로 볼보도 전기차 속도조절 중이다. 짐 로한 CEO는 지난 4일 유럽에서 가진 신차 공개 행사에서 “2030년까지 전기차 전환을 끝낼 준비가 돼 있지만, 시장과 인프라, 고객의 인식이 이를 따르지 못한다면 몇 년을 미룰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배터리 연쇄폭발 막는 기술 적용
볼보는 차체도 전기차 사고 시 배터리를 보호하도록 설계됐다고 강조했다. 전면부에 경량 알루미늄을 사용해 프레임의 무게를 줄이고 충격 에너지를 잘 흡수할 수 있도록 했다. 측면·후면 프레임에는 보론강으로 배터리 팩 구조의 강도와 안전성을 높였다. 볼보 관계자는 “동급 차종인 XC90과 비교했을 때 비틀림 강성과 충돌 시 에너지 흡수가 각각 50%·20% 향상됐다”라고 말했다.
■ "나보다 운전 잘하네" EX90 파일럿 어시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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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캘리포니아 뉴포트비치 인근 산복도로-. EX90의 ‘파일럿 어시스트’ 기능을 작동시키자 스티어링휠의 그립이 스르르 풀리며 좌우로 움직였다. 강원 대관령 옛길이 생각날 정도로 굽이진 길, EX90은 스스로 완급 조절을 하며 그 길을 빠져나갔다.
EX90의 인테리어는 심플함이 엿보였다. 에어컨 조향, 인포테인먼트시스템 등의 물리 버튼은 센터 디스플레이에 통합됐다. 통상 스티어링휠 오른쪽에 위치하는 비상등 물리 버튼도 센터 디스플레이에 자리를 내주고, 상부 실내등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조수석과 뒷좌석 천장 손잡이도, 글로브박스 손잡이도 없었다. 공간 활용성을 높이고 심플함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지만, ‘과하게 지웠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부에 익숙해지기까진 시간이 걸렸다.
시원하게 펼쳐진 상부 파노라마 선루프에 눈길이 들어왔다. 캘리포니아의 기온은 42도까지 치솟았다. 운전 내내 선루프가 오히려 독이 된 순간이었다. 볼보는 “스칸디나비아는 낮이 길고 밝은 여름과 어둡고 우울해지는 겨울이 명확한데 여기서 영감을 받았다”며 “파노라마 선루프와 유리를 많이 사용해 최대한 많은 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운전석에 앉자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건 세로로 배치된 14.5 인치의 센터 스크린이었다. 콕핏에선 스티어링휠 뒤 계기판, 센터, 헤드업디스플레이(HUD) 등 세 개의 스크린이 배치돼있다. HUD에선 속도와 제한속도 정보, 계기판에선 도로정보, 센터에선 차량 상태 등 각기 다른 정보를 제공한다. ‘정보의 홍수’를 막으려는 의도는 보였지만, 운전 중 시선이 계속 분산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헤드 레스트를 비롯해 실내 곳곳에 설치된 바워스앤윌킨스 오디오가 사운드 몰입성을 더했다. 콕핏 플랫폼으론 퀄컴의 스냅 드래곤이 채택됐다.
볼보가 EX90에서 처음 선보인 또 다른 첨단 안전기술 ‘운전자 이해 시스템’도 눈길을 끌었다. 운전자의 시선과 눈을 감는 횟수·시간 등을 관찰해, 운전자가 주행에 적합한 상태인지 차량이 체크하는 기술이다. 졸음운전 등 주행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할 경우 사고 예방을 위한 경고를 하거나, 자동으로 차량을 갓길로 옮겨 정차한다. ‘파일럿 어시스트’ 주행 중 스티어링휠에서 손을 떼고 시선을 옮기자 차량의 경고 메시지가 수차례 울렸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차량은 파일럿 어시스트 기능을 종료하고, 조향간을 운전자에게 넘겼다.
주행 성능은 훌륭했다. ‘대형 SUV’임에도 실제 주행은 빠릿빠릿하고, 꾹 밟아도 부드럽게 가속이 이어졌다. 핸들 조향도 가볍게 잘 움직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파일럿 어시스트’도 훌륭하게 작동했다. 자율주행보조 기능을 사용할 때 ‘직접 운전하는 것보다 답답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은데, 이 차에선 ‘나보다 운전을 잘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문제는 가격이다. 볼보는 미국에서 이 차의 소비자가를 7만9995달러(약 1억700만원)부터로 책정했다. 동급 내연기관인 XC90의 국내 판매가가 8720만원부터인데, 미국 판매가(5만7400달러·약 7700만원)보다 1000만원가량 높다. 볼보 측은 “EX90의 국내 출시와 판매가는 미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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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고석현 기자 ko.suk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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