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리스트 해고 위해 인사평가 조작 지시, 4년 차 대리의 선택
[김성호 기자]
한국을 비좁은 땅이라고들 말하지만, 그 좁은 땅 가운데서도 시선이 닿지 않은 곳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한다. 모든 자원을 빨아들이는 수도권과 달리 지방 소도시엔 좀처럼 사람들의 관심이 답지하지 않는다. 조선과 철강, 화학 등 대규모 산업단지가 주둔한 지방의 사정이란 발품 팔지 않는 한국 언론지형에선 과소대표 되는 것이 일상적이다.
수도권 사무직 직장인의 사정에 비하여 지방 생산직 육체노동자의 이야기가 언론에 얼마나 노출되는지를 살펴보는 건 흥미로운 일일 수가 있겠다. 특히 절대다수가 남성 노동자로 이뤄진 소위 중후장대 산업에 대하여선 통계와 회계장부, 이따금씩 파업과 산재 관련 숫자로만 전해지기 일쑤다. 그 언저리에 자리한 진짜배기 이야기를 들을 기회는 대체 얼마만큼 귀한가.
▲ 해야 할 일 포스터 |
ⓒ 명필름 |
특히 한국 대규모 조선소는 LNG와 LPG, 초대형 원유 운반선 등 단순 벌크선보다 기술력이 많이 필요한 특수상선 등을 전문적으로 제작한다. 이 같은 배들이 전 세계 곳곳을 오가며 에너지 수급과 제조업, 또 상업을 떠받치니 이들의 노동이야말로 이 시대 반드시 필요한 필수노동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뿐인가. 제조와 무역으로 먹고 사는 자원 부족한 나라의 살림살이를 생각하면 배를 지어 해외에 파는 일이 얼마나 중한 것인지를 알아야 마땅하다. 불과 반세기 전 산업이라고는 농업과 원양어업, 식료품이며 옷가지 따위를 생산하는 정도에 그쳤던 이 나라가 전략적으로 육성한 것이 조선업이란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아주 오랜 기간 조선업은 한국사회의 외연적 발전을 지탱하는 기둥으로 제 역할을 다해왔던 것이다. 수많은 숙련노동자가 필요한 이 산업의 역군들이 지금보다도 존중받아 마땅한 이유라 하겠다.
▲ 해야 할 일 스틸컷 |
ⓒ 명필름 |
강준희(장성범 분)는 한양중공업 입사 4년 차 대리다. 애인과의 사이에 아이가 생기고 자연스레 결혼을 앞두게 된 그다. 그런 그의 일상에 큰 변화가 이는데, 다름 아닌 인사발령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으나 인사발령은 아예 직장을 옮기는 이직만큼이나 낯설고 부담스런 일일 수 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완전히 새로운 영역의 업무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히 부서 사람들의 분위기도, 일을 대하는 자세도 완전히 다를 수가 있겠다.
상선 자재팀에서 근무하던 강 대리는 인사팀으로 발령이 난 뒤 숨 돌릴 틈 없이 업무에 매진한다. 수시로 야근이고, 주말출근도 일상이다. 그럴밖에 없는 것이 회사 사정이 좋지 않단 게 피부로 느껴지는 것이다. 닥쳐온 경기불안으로 수주가 뚝 끊긴 조선소가 을씨년스럽게까지 느껴진다. 때마침 회사 채권단이 구조조정을 요구하고, 인사팀엔 희망퇴직 접수부터 정리해고까지 구조조정을 위한 방안을 마련하란 지시가 떨어진다.
▲ 해야 할 일 스틸컷 |
ⓒ 명필름 |
그것만 해도 고단할 텐데, 더욱 충격적인 건 그 다음부터다. 경영진에서 소위 '블랙리스트'를 정리해고 명단에 포함시키란 지시가 내려온 것이다. 회사 방침에 사사건건 대들었던 이들을 이번 기회에 아예 털어내겠다는 것. 기존 근무평정에다 연차며 각종 수치화된 자료들을 근거로, 이들을 정리해고 대상에 넣기 위한 규칙을 마련하는 일이 강 대리 앞으로 떨어진다.
영화는 인사팀 직원들이 사측 입맛에 맞는 직원들이 노동자 대표로 선정되도록 애쓰는 모습을, 기준을 바꿔가며 타깃이 되는 이들이 최대한 정리해고 대상이 되는 방안을 개발하는 과정을, 심지어 선택된 방안에서 일부 포함된 사측 사람들을 몰래 구제하는 조치까지를 하나씩 보여준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해야 할 일'이 '하지 않아야 할 일'과 맞닿는 가운데, 4년 차 직장인 강 대리의 세계가 위태롭게 흔들린다.
▲ 해야 할 일 스틸컷 |
ⓒ 명필름 |
인사팀 내부 직원들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특히 수석인 인사팀장(김도영 분)과 수시로 그에게 대항하는 부장(김영웅 분)의 갈등은 회사라는 조직의 구조적 문제와 마주하여 직원이 보일 수 있는 대표적 태도를 보여주는 듯 전형적이면서도 현실적으로 다가든다.
인사팀장은 회사를 살리기 위해 구조조정이 불가피한 작업이라 믿는다. 한때 자부심 가득했던 조선소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선 오늘의 어려움을 지나쳐야 한다는 것이다. 블랙리스트를 털어내기 위해 정리해고안을 짜고 인위적으로 안을 매만지는 작업이 부당한 것은 알지만, 대의를 위해 어쩔 수 없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회사가 병들어 있는 것도, 그를 위해 대규모 수술이 불가피하단 것도 사실이니 말이다.
부장은 팀장을 이해할 수 없다. 인성 좋기로 소문난 그는 인사팀 밖에도 가까이 지내는 정든 동료가 여럿이다. 구조조정이란 그들을 해고하는 일이 아닌가. 그것도 인위적인 잣대를 들어 한때 공이 있었을 이들을 회사 밖으로 몰아내선 안 된다고 믿는다. 그라고 딱히 대안이 있는 건 아니지만, 팀장의 방식이 제게는 맞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으로 대응한다.
▲ 해야 할 일 211회 독립영화 쇼케이스에서 관객과의 대화에 나선 박홍준 감독. |
ⓒ 김성호 |
감독 박홍준은 <해야 할 일>을 찍으며 "치우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한다. "정치적으로 민감할 수 있는 주제와 배경이 있어서 너무 이입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며 "적당한 거리감을 가져가려 노력했다"고 영화를 찍는 동안의 자세를 설명했다. 그에게 이 작품은 지극히 가까운 내용이다. 실제 조선소 인사팀에서 4년 반을 근무한 탓이다. 그는 작가로서 쉬이 이입하기 쉬운 입장을 가졌음에도 최대한 객관성과 거리감을 유지해 관객에게 사고의 자유를 부여하고자 했다. 그 선택이 주인공인 준희의 캐릭터에서 드러난다.
그는 "준희의 성장배경을 저와 다르게 가져가면서 이 인물이라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할까 여러번 되물었다"며 "과거 학생운동도 좀 했던 설정이고 엄마나 선배, 애인인 재이가 모두 사회활동 경험이 있는 이들로 배치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시대 많은 수의 학생들이 학생운동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기대는 하지 않았던 시대를 살았고, 준희도 취업할 때가 돼서 취업을 한 것"이라며 그가 제가 해야 할 일을 마치고 관객을 향해 걸어오는 엔딩신을 "처음부터 그렇게 찍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해야 할 일>은 명필름문화재단이 신진 영화인을 지원하고 육성하는 명필름랩 6기 작품이기도 하다. 곧 개봉을 앞두고 있는 이 영화는 한국의 노동환경, 특히 주목받지 못했던 지방도시의 중후장대 산업 현장의 구조조정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낯설고 특색 있는 작품이 되겠다. 영화가 담고 있는 조선업과 구조조정, 또 그에 얽힌 이야기는 한 편의 평 안에 담기엔 풀어낼 사연이 적잖다. 그리하여 '씨네만세'는 두 편에 나누어 <해야 할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반드시 '해야 할 말'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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