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걸 알면서 나선 농민들, 위기 극복의 동력"
[황동환 기자]
▲ 박성묵(왼쪽) 회장과 박홍규(오른쪽) 작가가 동학농민혁명을 주제로 대담하고 있다. |
ⓒ <무한정보> 황동환 |
동학혁명농민군의 모습을 목판화로 재현하고 있는 박홍규 작가는 지난 2~13일 이음창작소에서 판화전 '개벽의 꿈, 내포하다' 전시회를 통해 관람객들에게 잊지 말아야 할 역사적 교훈을 생생하게 일깨워 줬다.
이 판화전은 과거의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 돼선 안된다는 생각을 가진 예산 군민들이 뜻을 모아 '동학농민혁명130주년 박홍규작가초대전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준비한 것이다.
전시 중간인 지난 9일에 열린 박홍규 작가와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박성묵 회장과의 좌담회는, 관람객들을 130년 전 상황으로 안내할뿐만 아니라 외세에 의존해 자국의 문제를 해결하는 안이한 태도와 정신이 어떤 결과를 낳게 되는지 동학혁명농민군을 대신해 전달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날 김영우 윤봉길평화연구소장의 사회로 두 사람이 2시간 동안 대담을 통해 주고받은 내용을 요약해 싣는다. 대담의 말문은 박성묵 예산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회장이 먼저 열었다.
"전시 장소인 '이음창작소'는 90여년 전에 일제가 예당평야에서 생산된 양질의 미곡을 저장하고 수탈하기 위한 용도로 지은 건물이다. 300여미터 떨어진 기차역을 통해 만주로 식량을 이송했다. 이곳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던 동학혁명농민군을 기억하는 전시회를 열고 있다는 것에 감회가 새롭다.
반민족적인 핏줄들이 기득권을 유지한 채 호가호위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이런 점에서 130년 전 조선왕조 말기 불의한 기득권에 저항해 정의를 바로 세우고 보국안민을 주창했던 동학혁명운동의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다. 박홍규 작가와 대담을 통해 동학혁명농민군이 추구했던 가치에 좀 더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같다.
일반 사람들 뇌리에 전라도 중심의 동학혁명을 떠올리는데, 실제 동학혁명운동은 함경남북도, 평안북도 위쪽과 개마고원만 빼고, 한반도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났던 운동이다. 이런 차원에서 25년 전부터 예산 지역 동학의 발자취를 찾아 발품을 팔면서, 사람들에게 생소할 수 있는 '내포동학혁명운동'이라는 용어를 많이 썼다.
그동안 동학혁명운동이 전라도에 국한돼 알려졌던 이유는 박정희 정권의 의도된 결과다.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을 일으킨 뒤 대통령으로 출마할 때, 참모들의 고민거리가 김대중 때문에 전라도 표가 10%도 안 나오는 문제였다.
당시 전라도 민심을 박정희 쪽으로 돌릴 방안을 고민하던 참모들은 전라도는 동학쟁이니까 동학을 인정해주면 전라도 민심을 살 수 있겠다는 의도에서 전봉준을 부각시키고 조병갑(조선 후기 부패한 탐관오리, 동학농민운동의 원인 제공자로 알려져있음)을 대표적인 나쁜 사람으로 묘사하기 시작하면서 '동학=전라도'라는 등식이 성립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공주보고 출신인 김종필이 동학군이 우금치를 못넘고 희생당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사람들이 동학혁명을 이야기할 때 전봉준, 황토현, 우금치를 연상하게 됐다. 하지만 당시 동학혁명운동은 경상도 하동, 산청에 이르기까지 전국에 걸쳐 일어났다.
이렇듯 동학혁명이 관주도로 선양되다보니 우금치를 넘지 못하고 있는데, 동학혁명운동의 실체를 알려면 탈 전라도, 탈 우금치를 해야하고, 그런 의미에서 내포지역 동학 역시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박홍규 판화 작가가 이를 들은 뒤 답했다.
"어렸을 때 저는 논에 가면 아버지로부터 '고부 뒷동산'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고등학교 때 비로소 전봉준이라는 인물을 접했을 정도로 동학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가, 30대 때 충남 부여에서 농민운동을 하면서 고부가 동학농민혁명운동의 핵심 지역임을 알게 됐다.
그 뒤로 자연스럽게 동학 관련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특히 110주년 때 목판화로 전시회를 한 것이 계기가 돼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동학혁명 당시 농민군의 모습을 판화에 담기 시작했다.
제 작품을 본 많은 사람들이 하던, '박홍규 작품은 이전 동학작품과 다르다'는 이야기도 그때부터 들었던 것 같다. 사람들의 평가가 '(박홍규) 이전 작품은 역사의식도 없고, 정부에서 그리라고해서 그린거라면 (이번) 박홍규 작품은 무지랭이 농민들이 오죽하면 들고 일어났을까를 생각하게 하는 그림이었다'는 것이다.
▲ 박홍규 작가와 박성묵 회장의 대담이 끝난 뒤 참석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무한정보신문 |
ⓒ <무한정보> 황동환 |
- 일제가 전쟁 성과 홍보 수단으로 목판화를 활용했다면 박 작가는 민중계몽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목판화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일본이 목판기술이 상당히 발달됐던 것 맞다. 중국 불교 쪽 목판화도 유명하다. 우리나라 불교도 목판 불화 역사가 있다. 장화홍련전, 홍길동전 책이 나올 때 삽화로 목판화가 사용됐던 사례가 있다. 동아시아에서 목판으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새긴 역사는 오래됐다. 중국도 문화혁명기에 목판화를 선전선동용으로 사용했다.
일본은 전쟁의 승리를 알리고 기록하기 위해 활용했다.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목판화의 존재가 사라지지 않았나 생각한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 진영에서 우리 것에 대한 각성이 일면서 목판화 운동이 일어났는데, 나도 그 영향을 받았다."
- 어쩌면 농민들에게 국가가 제대로 밥을 잘 먹게만 해줬어도 동학혁명운동은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동학은 정의를 부르짖고, 나라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동학이 양반 때려잡는 등의 축소된 의미가 아니라 대일항쟁의 큰 시발점이 됐다는 점에서 민족사적 의미를 새롭게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
일본이 과거 자신들이 자행했던 잘못에 대해 반성과 사과를 요구하는 우리나라에 외교적 굴욕감을 안겨주는 모습을 보면 동학군을 토벌하기 위해 우리 땅에 들어왔던 130년 전 일본의 근성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동학의 위대한 지점은 일찌감치 평등사상을 주창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당시 동학농민군들에게 무시무시한 존재였던 일본인들을 향해 결기를 보였던 점은 지금 돌아봐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가진 것이라고는 고작 손에 죽창 하나 드는 게 전부였을 농민들이 어떻게 그런 용기를 가질 수 있었을지, 생각하면 경이롭다.
싸우면 뻔히 죽을 줄을 알면서도 일본군의 총칼을 피하지 않았던 동학농민군의 결기와 용기는 알량한 권력에 빌붙어 이기적인 욕심에 눈이 멀어 자신의 신념을 헌신짝 버리듯 내팽개치는 사람들로 인해 흔들리는 정의를 바로잡을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동학혁명의 정신은 우리나라의 여러 변혁기에 고비를 겪을 때마다 위기를 극복하고 진보의 역사를 쓰게 한 동력이 됐다. 지금 그리고 앞으로 또 어떤 고난과 고비가 우리에게 닥칠지 모르지만, 이를 극복할 힘 역시 동학혁명의 정신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충남 예산군에서 발행되는 <무한정보> 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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