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째 동거 중인 위기의 커플, 불화의 원인은 이 음반

김상목 2024. 9. 23.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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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줄리엣, 네이키드>

[김상목 기자]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애니'는 영국 동부의 한적한 해변마을 역사박물관에서 일한다. 전성기 한참 지난 한적한 휴양지의 나날은 변함없는 일상의 반복이다. 애니에겐 동거 중인 남자친구 '던컨'이 있다. 미국에서 건너와 지역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는 그와 함께 지낸 지 벌써 15년째이지만, 둘은 법적 결혼이나 2세 계획은 없다. 그저 둘이 오붓하게 살기로 정한 지 오래다. 가끔 그 생각이 흔들리긴 하지만.

함께 15년을 지냈으니 둘의 사이는 나쁠 리 없다. 다만 던컨의 취미생활이 문제다. 그는 25년 전 마지막 앨범 발매 뒤 공연 도중 사라져 소식이 끊긴 록스타 '터커 크로우'의 열혈 팬이다. 이 신비로운 존재에 흠뻑 빠진 그는 팬클럽 사이트를 이끌며 전 세계 터커 크로우 팬들 사이에서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가수는 사라졌지만, 온라인에서 팬들은 그의 행방을 추적하고, 온갖 일화를 공유하며 애절한 외사랑을 이어간다.

애니 역시 동거남 덕분에 터커 크로우에 대해 어느새 웬만한 팬클럽 회원 못지않은 지식을 갖춘 지 오래다. 하지만 자신과의 삶에 집중하지 못하고 밤마다 지하실 비밀 아지트에서 온라인 팬클럽 활동에 탐닉하는 던컨 때문에 서운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애니는 이제 2세에 관한 생각이나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고민에 끙끙 앓건만, 던컨은 걱정을 함께 나눌 짬이 없다. 애니가 보기엔 주인공은 어디서 뭘 하는지도 모르는데 중년 남자들끼리 갑론을박하는 행태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말이다.

집에 우편물이 도착한다. 음반회사 다니는 던컨의 지인이 최근 발견된 터커 크로우의 미공개 데모 음원을 보내준 것이다. 우편물은 오는 족족 '언박싱'하던 습관에 따라 애니는 앨범을 열고 음원을 들어본다. 하지만 그 순간 들이닥친 던컨은 감히 자신이 신처럼 떠받드는 가수의 희귀음원을 먼저 들었다는 이유로 짜증을 내고, 속 좁은 행동에 애니는 있는 정 없는 정 다 떨어질 지경이다.

분을 참지 못한 애니는 익명으로 던컨이 교주처럼 군림하는 팬클럽 사이트에 터커 크로우의 새 데모 음원에 대한 신랄한 비평을 기고한다. 그런데 인상 깊게 잘 봤다며 자신도 의견에 공감한다는 메일이 도착한다. 발신인 '터커 크로우'다.

위기의 커플을 유머러스하게,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리다
▲ "줄리엣, 네이키드"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마노엔터테인먼트
대중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소소한 일상과 연애를 맛깔나게 녹여내기로 정평이 난 닉 혼비의 소설 원작 <줄리엣, 네이키드>는 새침한 영국 숙녀 & 열혈 음악 애호가 & 퇴물 가수 사이에서 벌어지는 당황스럽지만 꽤 발랄한 로맨스물이다. 주변에 던컨 같은 존재가 있다면, 배를 잡고 웃어대며 영화와 현실 행태를 비교하며 놀려먹는 재미가 충만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런 상대와 함께 산다면 남들에겐 말 못 할 고행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그거 하나만 빼면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인데, 그렇다고 그 부분만 분리 배출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하소연해도 바뀔 리 없다. 오랜 커플인데도 자신이 애호하는 가수만은 'No Touch!'를 강요하는 상대에게 욱하지 않을 수 없다.

당사자인 애니는 은밀한 앙갚음을 벌인다. 물론 음험한 책략이나 뒤통수까진 아니다. 그저 대놓고 논쟁하면 사이 나빠질까 염려해 '대나무숲' 활용하는 정도다. 하지만 갑자기 주인공이 등판하면 어떨까? 영화는 그런 상상을 실제로 구현한다. 남자친구는 늘 애니에게 자신이 팬클럽에서 가장 터커 크로우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는다고 으스대기 일쑤다. 하지만 정작 그 주인공은 교주처럼 군림하는 남자친구의 의견이 아니라 자신의 비평에 동의를 밝힌다. 당장 던컨에게 여기 보라며 자랑하고 싶지만, 애니는 애써 참는다. 그저 은밀한 기쁨으로 간직하고 싶다.

하지만 15년 동안 함께한 중년 커플에게 때맞춰 위기가 도래한다. 애니는 중년들 모여 종적 감춘 지 오래인 가수에 대해 땅따먹기하듯 누가 더 많이 아느냐 경합하는 동호회 활동이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던컨은 왕이 없는 왕국에서 섭정으로 권세를 누리는 데 빠져 헤어나올 생각이 없다. 게다가 애니가 자신을 몰 이해한다는 핑계로 바람까지 피운다. 그런 던컨에 대한 복수심으로 터커와 이메일을 주고받던 애니는 점점 그의 과거 회한과 현실 고민을 교감하며 감정을 쌓아간다.

불화 근원이 된 데모 음원은 터커의 마지막 앨범 'Juliet'의 어쿠스틱 데모 음원, 제목도 'Juliet, Naked'였다. 자신의 개인사가 깊숙하게 깔린 내용이기에, 애니는 터커와 자연스럽게 그의 실제 삶을 공유하기 시작한다. 던컨과 팬클럽 무리가 어디서 들었다며 동호회 내에서 갑론을박하던 전설 같은 내용과는 무척 다른, 그를 사라지게 했던 좌충우돌 방황의 기록이다. 그는 현재 미국 시골에서 집도 없이 전 애인 집 차고에서 기거하는 중이다. 몰락한 왕년의 스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애니가 품고 있는 삶의 전환 고민과 찰떡궁합이다.

애니와 던컨 사이에는 중년의 위기를 극복하고 새롭게 두 번째 시기로 접어드는 연착륙 vs 각자 새로운 출발 도전 두 갈래 분기점이 있다. 던컨은 번듯한 지식인이지만 그의 일상은 이미 활동을 중단한 지 오래인 퇴물 가수를 매개로 폐쇄된 우주에 자신을 가둔 상태다. 애니는 답답한 시골 일상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시험할 도전 기회를 놓친 채 쳇바퀴 돌 듯 보내는 나날이다. 던컨은 그런 변화를 하필 동료 교수와의 외도로 감행하고, 애니는 어쩌다 보니 던컨이 추앙하는 터커 크로우의 실체와 대면하는 반전을 맞이한 것이다. 터커와 교류하면서 애니는 '반면교사'라 할 그에 깊숙이 개입하게 된다.

반성하며 변화하려는 스타 vs 과거의 추억을 부여잡는 팬
▲ "줄리엣, 네이키드"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마노엔터테인먼트
"당신은 아주 나쁜 남자예요. 다섯 아이들 중 네 아이에게 쓸모없는 아빠였고 전처들 모두에게 쓸모없는 남편이었고 여자친구들 전원에게 쓰레기 같은 남자친구였어요. 그래도 < Juliet >은 여전히 훌륭해요." ([벌거벗은 줄리엣] 소설 발췌. 문학사상사, 2015)

터커 크로우의 인생은 '나쁜 남자'이자 던컨 패거리가 동경하는 '록스타' 자체다. 하지만 터커는 어떤 계기로 '줄리엣'에 얽힌 사건을 체험하고, 다시는 마이크와 기타를 잡지 못한다. 던컨이 동경하던 자유분방한 삶을 정작 본인은 참회하며 반성할 뿐이다. 애니가 단지 분풀이로 날린 비평 내용은 알고 보니 뒷걸음치다 제대로 밟은 셈이다.

애니는 그런 터커의 고통과 슬픔을 있는 그대로 공감하며 위로하지만, 정작 던컨은 동경하던 스타의 진실 앞에서 이를 올곧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미 '신화'가 된 터커 크로우가 현실의 가수 대신 뇌리를 지배하는 것이다. 물론 던컨의 주장은 원천인 가수에 대한 이기심의 발로이긴 하지만 이는 단순히 왜곡된 팬심 차원이 아니다. 시대의 우상으로 받들어지는 대중문화 스타와 그 생산물에 대한 권리와 해석의 주인은 누구냐에 대한 담론으로 확장하는 것이다.

던컨은 홀연히 사라지기 전 터커의 음악과 기저에 깔린 방랑자의 정신세계, 그리고 그에 따른 행보를 동경하며 추종해 왔다. 그런 그 앞에 이제 과거를 반성하며 후회하는 노년의 대상이 서 있다. 전설이 무너지는 걸 던컨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우리 스타는 이래야만 돼! 외침은 근래 대중문화판에서 어렵지 않게 포착되는 면모다. 웃으며 보다가 문득 제대로 찔리는 기분이다.

<비포 선라이즈> 4번째 에피소드가 나왔다면 이런 그림일까?
▲ "줄리엣, 네이키드"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마노엔터테인먼트
터커 역을 맡은 배우 에단 호크의 이미지는 (소설과) 영화의 교훈을 극대화하는데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궁합이다. 기분 내키는 대로 살며 한 군데 묶이기 싫다 제멋대로 행동하고 책임지기 싫어 도망치던 과거를 후회하니 더는 예전 부르던 노래를 못하게 되었다는 터커 크로우, 자신이 뿌린 혼외자들에 가책을 느끼며 어느새 '할아버지'가 될 상황에 직면한 왕년의 스타가 애니의 집 지하실에서 자신의 빛나던 시절 흔적을 목격하고, 아버지이자 할아버지로서 다시 재기하기까지 고뇌를 담담하게 보여주는 배우의 연기는 은은하게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엔진이 된다.

'터커 크로우'의 모습은 어쩔 수 없이 그의 대표작인 <비포> 3부작의 흥취를 떠올리게 만든다. 어쩌면 끝내 제작되지 못한 <비포> 시리즈 3+1 외전 같은 내용이 아닐까? '제시'가 '셀린'과 헤어지고 과거를 후회하며 어딘가 은둔하고 있다면 저런 모습 아닐지 하는 상상이다. 그만큼 나이 먹은 풍경과 함께 배우 특유의 사색적이고 진지하면서도 '훗'하고 분위기를 편안하게 바꿔버리는 마성이 '지대로' 치고 들어오는 기분이다.

영화는 소설 분위기 그대로 파국적 전개를 취하지 않고도 타인에게 말하기 힘든 인생의 전환점에 놓인 이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제공하는, 퍽 괜찮은 소품으로 기능한다. 애니는 터커와 그의 막내아들 '잭슨', 숱한 터커의 옛 연인 및 배다른 자녀들과 부대끼면서 영원하리라 의심하지 않던 고향 마을과 동거생활을 올곧게 판단하고 새로운 미래를 찾을 용기를 얻는다. 터커 역시 애니와 교류 덕에 황혼에 찾아든 위기를 회한에 쌓여 흘려보내는 대신, 오랫동안 버려둔 가족을 향한 책임감으로 되살릴 기회를 얻는다. 물론 과거 오류는 후회한다고 되돌릴 수 없지만, 이제라도 책무를 저버리지 않고 올바른 길을 간다면 중간은 가게 마련이다.

영화는 로맨스 장르에 충실한 패턴을 선보이지만, 원작을 잘 살린 당대 대중문화와 록 음악에 대한 충실한 이해는 던컨이 몰두하는 팬클럽 활동의 명과 암, 예술가와 그의 생산물이 대중에게 공개되고 상품화되는 순간 관련 책임과 권리는 어디로 귀속되는가에 대한 흥미로운 진단까지 도달한다. 요즘처럼 문화예술 분야가 상업화되는 상황에서 그런 문제의식은 원작자의 고려를 초월해 독자/관객에게 더 파급력으로 와닿을 테다. 묘하게 원작의 문제의식이 확장되는 지점은 이 작품이라고 의외가 아닌 셈이다. 그런 문화산업의 모순적 딜레마와 중년이 된 커플의 미래를 향한 고민이 적절히 궁합을 맞춘 모범 사례 같은 영화다.

<작품정보>

줄리엣, 네이키드
Juliet, Naked
2018 미국, 영국 앵콜 로맨스
2024.09.25. 개봉 97분 15세 관람가
감독 제시 페레츠
출연 에단 호크, 로즈 번, 크리스 오다우드 외 다수
원작 닉 혼비, 소설 [벌거벗은 줄리엣]
수입 ㈜더쿱디스트리뷰션
배급 ㈜마노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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