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분교장 터에 독립기념관이 있다

정만진 2024. 9. 23.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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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독립운동가 10] 9월 23일 타계한 이용환 지사

[정만진 기자]

 경북 청도군 운문면 금천초등학교 문명분교 터에 설립되어 있는 운문면 3.18독립운동기념관과 문명교육재단 독립유공자 김우곤 선생 송덕비
ⓒ 국가보훈부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702(운문로 1558) 금천초등학교 문명분교 터에 '운문면 3·18독립운동 기념관'이 있다. 2002년 7월 25일 설립되었으니 벌써 22년이 넘었다. 국가보훈부 현충시설정보서비스의 관련 '시설 내용'을 읽어본다.
운문면 3·1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월 고종 황제 국장에 참여하고 고향에 돌아온 김상구, 김종대(인용자 주: 김종태의 오기)가 당시 사립 문명 학교장 김우곤의 집에서 동지 여러 명을 모아 독립회를 조직하여 결의문을 만들고 독립만세 운동을 준비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3월 18일 정보를 접수한 일경들이 독립회 청장년들을 모두 잡아가려 하자 동네 주민들과 독립 회원들이 힘을 합쳐 일으킨 대한 독립 만세 운동이 운문면 3·18 독립운동이다.

3·18독립운동 기념관은 방지초등학교 문명분교장(인용자 주: 2015년 3월 1일 금천초등학교 문명분교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문명분교장도 2018년 2월 28일 폐교되었다)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는 학교 내 유일한 독립기념관이다. 1919년 기미년 3월 18일 청도군 운문면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유가족과 경상북도 교육청의 지원으로 2002년 건축한 것이다.

산골 초등학교의 분교장 터에 독립운동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아니, 아주 바람직한 일이다. "학교 내 유일한 독립기념관"이라 한다. 인구 250만 대도시 대구광역시에도 없는 독립기념관을 본교도 전교생이 45명(2024년 3월 1일 기준)뿐인 산골 초등학교의 폐교된 분교장 터에서 보다니! 참으로 눈물겹다.

독립 13개월 만에 타계한 독립지사, 안타깝다

1946년 9월 23일 이용환(李龍煥) 지사가 세상을 떠났다. 경북 청도군 운문면 공암리 735가 본적인 지사는 당시 향년 47세였다(1899년 1월 19일 출생). 아직 나이가 그렇게 많지 않았고, 특히 조국이 독립을 되찾은 지 불과 13개월 만이었으므로 너무나 안타까운 타계였다.
 대구복심법원 1919년 판결문
ⓒ 국가보훈부
운문면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난 때는 1919년 3월 18일이었다. 1908년 사립학교로 개교한 문명학교(文明學校) 졸업생들이 주도했다. 문명학교 졸업생 김상구와 김종태가 광무황제 국장 참배차 상경했다가 서울 상황을 목격하고 귀향한 것이 시발점이었다.

문명학교 졸업생들, 경북 청도 운문면 만세 시위 주도

3월 15일 김재화, 박창기, 손기현이 박창기의 집에서 벽보 20여 장을 만들어 운문면 일원의 대천동, 방음동, 박지동, 오진동 등지의 시장과 그 외 곳곳에 부착했다.

"우리 동포형제들은 이 때를 놓치지 말고 삼천리 강토를 다시 찾아야 한다. 죽음은 한 번이지 두 번이 아니다. 우리 동포형제는 어째서 이렇게 적막한가. 동포여! 이 때는 어느 때인가! 한 번 일어나라. 때는 다시 오지 않는다. 혈혈(血血) 대한독립만세! "

이 일로 운문 주재소는 3월 18일 오전 강재식, 김대선, 김상구, 김재화, 김종식, 김종태, 김진효, 손한조, 홍용팔, 홍해성 등을 즉각 연행했다. 운문 주재소에서 취조를 받고 귀가하던 이들은 오진동 임봉식의 집에서 만세시위를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 논의했다.

이윽고 이들은 오후 3시 대천동 소재 운문면 사무소로 가서 김종태가 가져온 천에 '대한 독립 만세'와 '독립회'를 써넣어 '독립만세 기' 깃발을 만들었다. 글자는 참가자들이 돌아가며 한 자씩 나눠 썼는데, 이용환이 '립'자를 맡았다. 김진효의 선창으로 '대한 독립 만세'를 목청껏 외치면서 시위가 시작되었다.

'대한독립만세'와 '독립회' 써넣은 깃발을 흔들며

갓 스무살 이용환이 임봉서 등과 함께 운문면 각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독립 만세"를 불러 주민들을 합세시켰다. 이용환은 일제 경찰이 저지하자, 그날 밤 김문근, 박영묵, 윤병림, 최성희 등 자신이 거주하는 공암동 주민들을 규합해 강가 정자에서 "소년 활동" 창가를 부르며 재차 독립 만세를 외치고 행진했다.

3월 19일 청도 경찰서 일본인 순사와 조선인 순사보 5명이 시위 주동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출동했다. 만세시위로 한창 기세가 올라있던 주민들이 그들에게 순순히 굴복할 리 없었다. 동민들이 일제 경찰을 구타해서 내쫓았다.

이튿날인 3월 20일 대구 헌병분대 헌병 3명과 청도 경찰서장 이하 5명의 경찰이 들이닥쳐 대대적 검거 작업을 벌였다. 이때 이용환도 체포되어 징역 8개월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르고 고문을 당했다.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이용환 지사에 대해 "묘소 위치 확인이 필요한 독립유공자입니다"라는 설명을 달아 놓았다. 일찍 타계하신 만큼이나 또 안타까운 일이다.

덧붙이는 글 | 국가 인정 독립유공자가 1만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는 매월 한 분을 선정하면 1500년 이상, 세 분을 선정하면 500년 이상 걸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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