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 (56)
홍석원 2024. 9. 23. 11:20
남편의 죽음에서 벗어나려 컬렉션을 기증한 도메니카
앙드레 드랭(André Derain, 1880~1954)은 시인이자 미술평론가인 아폴리네르의 조언으로 시인 막스 자코브(Max Jacob)를 통해 젊은 미술상 폴 기욤(Paul Guillaume)을 만났다.
대부분 미술상들은 부르주아 출신인데 기욤은 자동차 정비소 직원이었다. 그는 우연히 아프리카 조각상을 접하고 원시적이고 독특한 미적 감각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차고 한편에 아프리카 조각상을 전시하고 있을 때 지나가던 아폴리네르와 만났다.
1916년 초 기욤은 파리의 미호메닐(Miromesnil) 가에 있는 그의 갤러리에서 드랭의 전시회를 열었다. 그는 자신을 비롯하여 아폴리네르, 상드라르(Blaise Cendrars), 리베르디(Pierre Reverdy) 및 디브아르(Fernand Divoire) 등 시인들에게 카탈로그를 작성하도록 부탁할 만큼 심혈을 기울였다.
기욤은 전시회를 열어준 가까운 화가들이 자신의 이미지를 그렸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다. M자로 벗겨진 머리에 콧수염을 기른 기욤은 우아하지만 냉담한 표정이다. 수평 붓터치의 파란색 배경에 양복과 나비넥타이도 그의 눈처럼 파란색이다. 파란색은 그가 정말 좋아하는 색깔이었다.
서양인은 눈동자 색과 일치하는 의상을 입었을 때 가장 세련되어 보인다.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기욤의 왼손에는 모딜리아니가 그린 초상화처럼 꺼져가는 담배를 들고, 미술상 답게 아트 북 또는 카탈로그에 팔을 올렸다. 그러나 모델의 특징이 왜곡되어 실제 모습과는 그리 닮지 않았다.
드랭은 블라맹크와 함께 자신의 고향인 센강 근처 사투(Chatou)에서 활동하며 ‘사투파(Ecole de Chatou)’라 불릴 때 가장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드랭은 입체파 운동도 시작한 화가였지만, 이 초상화는 드랭이 전통적인 회화 양식으로 돌아가는 시기에 그려졌다.
폴 기욤 부인, 도메니카의 초상화는 그녀의 모습 그대로다. 도메니카는 차양이 넓은 페도라를 쓰고 스톨을 둘러 우아하고 아름답다. 공들여 화장을 한 얼굴은 모딜리아니의 여인처럼 긴 코와 목이 돋보인다. 그러나 드랭이 강조한 흰색 눈동자는 우리를 직접 바라보는 듯하며 표정은 아주 심각하다.
프랑스 남동부에서 태어난 줄리엣 라카즈(Juliette Lacaze, 1898-1977)는 1910년대 말 파리에 정착했다. 섬세한 아름다움과 강인한 성격을 지닌 그녀는 몽파르나스의 카바레에서 일하며 아방가르드 예술가들과 어울렸다.
그녀는 장래가 촉망되는 기욤과 1920년에 결혼했고, 그는 도메니카라는 애칭을 붙여 주었다. 이렇게 신분이 상승한 도메니카는 사교계에 진출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매력과 사회적 지위를 이용하여 사람들의 호감을 얻을 줄 알았고, 심리적 우위를 차지하여 남편과 연인 장 발터(Jean Walter)를 가스라이팅 하였다.
미술관을 세우려던 기욤은 경제적인 문제에 부딪쳤고 건축가인 장 발터에게 의뢰하여 집을 짓기로 하였다. 그러나 새집으로 이사한 기욤은43살이란 젊은 나이에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하였다. 사람들은 기욤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품었지만, 탐욕스럽고 파렴치한 도메니카는 자신의 지위와 재산을 유지하기 위해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드랭은 도메니카의 얼굴 뒤에 감춰진 진실을 꿰뚫어 보고 그림에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이 초상화는 ‘팜므 파탈’을 대변하는 악명높은 도메니카의 상징이 되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네덜란드 화가 키스 반 동겐(Kees Van Dongen, 1877~ 1968)이 기욤의 초상화를 그렸다.
실제로 기욤은 1918년 3월에 그의 작품 25점을 모아 예술가에게 헌정하는 전시회를 개최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 12년 후 기욤은 인정받는 미술상이 되었고 반 동겐은 유명한 예술가가 되었다.
기욤은 왼쪽 포켓 위에 레지옹도뇌르 훈장의 아주 작은 빨간 리본을 달았다. 그는 1930년 4월 7일 편집자이자 미술 평론가로서 잡지 <파리의 예술 Les Arts à Paris >로 이 상을 받았다. 이 초상화는 수상 기념으로 곧바로 의뢰된 것으로 보인다.
반 동겐은 이 작품을 위해 회색과 파란색의 미묘한 조화를 선택했다. 기욤은 11년 전에 드랭이 그린 초상화보다 더 젊어 보인다. 드랭과 반 동겐 모두 야수파의 화가지만 두 화가의 화풍의 차이가 그렇게 만들었다. 반 동겐은 순수한 색채와 분방한 표현으로 감각적이며 세련된 작품 세계를 가진 화가였다.
기욤은 최신 패션인 파란색 더블 수트를 입었으며, 파란색으로 나비 넥타이, 눈동자, 머리에 하이라이트를 주었다. 가로세로의 비율이 비슷한 동안에 붉은 터치는 더욱 젊어 보이고, 회색 배경은 머리 주위를 밝게 하여 얼굴을 더 부각시킨다.
1912년경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1885-1956)은 아폴리네르를 통해 폴 기욤을 만났다. 아폴리네르는 ‘모나리자 도난사건’으로 경찰에 조사를 받은 후 로랑생과 헤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적성국 독일인과 결혼한 로랑생은 1차세계대전 기간과 전후, 거의 5년 간 스페인, 스위스, 독일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예술의 중심지인 파리에서 떨어져 지내다 다시 파리로 돌아온 그는 화풍이 바뀌었다. 로랑생은 이제 파스텔톤을 사용하여 양식화된 특정 여성성을 간직한 이미지로 묘사했다.
로랑생은 생각에 잠겨 약간 기울어진 도메니카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투구를 쓴 듯한 헤어스타일, 큰 눈 위에 짙은 갈매기 눈썹, 얼굴 윤곽선은 도메니카다. 도메니카의 자세, 드레스, 핑크색 스카프는 모두 오른쪽 커튼과 조화를 이룬다. 화가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모티프인 다리를 꼰 커다란 회색 개와 도메니카가 가져간 꽃다발을 배치했다.
도메니카는 기욤이 죽은 뒤, 연인 장 발터와 1941년에 재혼한다. 발터는 기욤의 컬렉션을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해 애를 썼다. 발터 사후, 1950년대 말에 도메니카는 이 컬렉션을 정부에 기증하였다. 도메니카는 이로서 첫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한 의혹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미술관에서 웬만하면 기증자에 대한 긍정적인 표현을 하는데, 드랭이 그린 초상화에 대한 해설만으로도 그녀의 악명을 가늠할 수 있다.
이후 도메니카가 죽고 7년 뒤, 1984년부터 오랑주리 미술관 지하 공간에는 폴 기욤과 장 발터의 컬렉션이 전시되고 있다. 예술은 예술의 존재로 삶에 대한 커다란 위로가 되고, 삶은 또한 삶으로서 예술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어쨌든 우리는 도메니카 덕분에 삶과 예술의 비정한 일면을 직시하게 되었다.
◇최금희 작가
최금희는 미술에 대한 열정과 지적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수차례 박물관대학을 수료하고, 서울대 고전인문학부 김현 교수에게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예술의 전당 미술 아카데미에서는 이현 선생에게서 르네상스 미술에 대하여, 대안연구공동체에서 노성두 미술사학자로부터 서양미술사를, 그리고 미셀 푸코를 전공한 철학박사 허경 선생에게서 1900년대 이후의 미술사를 사사했다. 그동안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통해 작가별로 그의 이력과 미술 사조, 동료 화가들, 그들의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 그리고 관련된 소설과 영화, 역사 건축을 바탕으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현재 서울시 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쿠키뉴스=홍석원 기자
홍석원 기자 001hong@kukinews.com
화가들이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면, 그들의 작품을 컬렉터에게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이들은 아트딜러이다.
화가와 아트딜러는 서로 꼭 필요한 경제공동체다. 자신의 전시회를 열어준 딜러를 위해 초상화를 그려주는 일은 화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보답이다. 여기 오랑주리에 미술상(美術商) 폴 기욤부부를 그린 초상화들이 있다.
화가와 아트딜러는 서로 꼭 필요한 경제공동체다. 자신의 전시회를 열어준 딜러를 위해 초상화를 그려주는 일은 화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보답이다. 여기 오랑주리에 미술상(美術商) 폴 기욤부부를 그린 초상화들이 있다.
앙드레 드랭(André Derain, 1880~1954)은 시인이자 미술평론가인 아폴리네르의 조언으로 시인 막스 자코브(Max Jacob)를 통해 젊은 미술상 폴 기욤(Paul Guillaume)을 만났다.
대부분 미술상들은 부르주아 출신인데 기욤은 자동차 정비소 직원이었다. 그는 우연히 아프리카 조각상을 접하고 원시적이고 독특한 미적 감각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차고 한편에 아프리카 조각상을 전시하고 있을 때 지나가던 아폴리네르와 만났다.
1916년 초 기욤은 파리의 미호메닐(Miromesnil) 가에 있는 그의 갤러리에서 드랭의 전시회를 열었다. 그는 자신을 비롯하여 아폴리네르, 상드라르(Blaise Cendrars), 리베르디(Pierre Reverdy) 및 디브아르(Fernand Divoire) 등 시인들에게 카탈로그를 작성하도록 부탁할 만큼 심혈을 기울였다.
기욤은 전시회를 열어준 가까운 화가들이 자신의 이미지를 그렸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다. M자로 벗겨진 머리에 콧수염을 기른 기욤은 우아하지만 냉담한 표정이다. 수평 붓터치의 파란색 배경에 양복과 나비넥타이도 그의 눈처럼 파란색이다. 파란색은 그가 정말 좋아하는 색깔이었다.
서양인은 눈동자 색과 일치하는 의상을 입었을 때 가장 세련되어 보인다.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기욤의 왼손에는 모딜리아니가 그린 초상화처럼 꺼져가는 담배를 들고, 미술상 답게 아트 북 또는 카탈로그에 팔을 올렸다. 그러나 모델의 특징이 왜곡되어 실제 모습과는 그리 닮지 않았다.
드랭은 블라맹크와 함께 자신의 고향인 센강 근처 사투(Chatou)에서 활동하며 ‘사투파(Ecole de Chatou)’라 불릴 때 가장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드랭은 입체파 운동도 시작한 화가였지만, 이 초상화는 드랭이 전통적인 회화 양식으로 돌아가는 시기에 그려졌다.
폴 기욤 부인, 도메니카의 초상화는 그녀의 모습 그대로다. 도메니카는 차양이 넓은 페도라를 쓰고 스톨을 둘러 우아하고 아름답다. 공들여 화장을 한 얼굴은 모딜리아니의 여인처럼 긴 코와 목이 돋보인다. 그러나 드랭이 강조한 흰색 눈동자는 우리를 직접 바라보는 듯하며 표정은 아주 심각하다.
프랑스 남동부에서 태어난 줄리엣 라카즈(Juliette Lacaze, 1898-1977)는 1910년대 말 파리에 정착했다. 섬세한 아름다움과 강인한 성격을 지닌 그녀는 몽파르나스의 카바레에서 일하며 아방가르드 예술가들과 어울렸다.
그녀는 장래가 촉망되는 기욤과 1920년에 결혼했고, 그는 도메니카라는 애칭을 붙여 주었다. 이렇게 신분이 상승한 도메니카는 사교계에 진출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매력과 사회적 지위를 이용하여 사람들의 호감을 얻을 줄 알았고, 심리적 우위를 차지하여 남편과 연인 장 발터(Jean Walter)를 가스라이팅 하였다.
미술관을 세우려던 기욤은 경제적인 문제에 부딪쳤고 건축가인 장 발터에게 의뢰하여 집을 짓기로 하였다. 그러나 새집으로 이사한 기욤은43살이란 젊은 나이에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하였다. 사람들은 기욤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품었지만, 탐욕스럽고 파렴치한 도메니카는 자신의 지위와 재산을 유지하기 위해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드랭은 도메니카의 얼굴 뒤에 감춰진 진실을 꿰뚫어 보고 그림에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이 초상화는 ‘팜므 파탈’을 대변하는 악명높은 도메니카의 상징이 되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네덜란드 화가 키스 반 동겐(Kees Van Dongen, 1877~ 1968)이 기욤의 초상화를 그렸다.
실제로 기욤은 1918년 3월에 그의 작품 25점을 모아 예술가에게 헌정하는 전시회를 개최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 12년 후 기욤은 인정받는 미술상이 되었고 반 동겐은 유명한 예술가가 되었다.
기욤은 왼쪽 포켓 위에 레지옹도뇌르 훈장의 아주 작은 빨간 리본을 달았다. 그는 1930년 4월 7일 편집자이자 미술 평론가로서 잡지 <파리의 예술 Les Arts à Paris >로 이 상을 받았다. 이 초상화는 수상 기념으로 곧바로 의뢰된 것으로 보인다.
반 동겐은 이 작품을 위해 회색과 파란색의 미묘한 조화를 선택했다. 기욤은 11년 전에 드랭이 그린 초상화보다 더 젊어 보인다. 드랭과 반 동겐 모두 야수파의 화가지만 두 화가의 화풍의 차이가 그렇게 만들었다. 반 동겐은 순수한 색채와 분방한 표현으로 감각적이며 세련된 작품 세계를 가진 화가였다.
기욤은 최신 패션인 파란색 더블 수트를 입었으며, 파란색으로 나비 넥타이, 눈동자, 머리에 하이라이트를 주었다. 가로세로의 비율이 비슷한 동안에 붉은 터치는 더욱 젊어 보이고, 회색 배경은 머리 주위를 밝게 하여 얼굴을 더 부각시킨다.
1912년경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1885-1956)은 아폴리네르를 통해 폴 기욤을 만났다. 아폴리네르는 ‘모나리자 도난사건’으로 경찰에 조사를 받은 후 로랑생과 헤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적성국 독일인과 결혼한 로랑생은 1차세계대전 기간과 전후, 거의 5년 간 스페인, 스위스, 독일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예술의 중심지인 파리에서 떨어져 지내다 다시 파리로 돌아온 그는 화풍이 바뀌었다. 로랑생은 이제 파스텔톤을 사용하여 양식화된 특정 여성성을 간직한 이미지로 묘사했다.
로랑생은 생각에 잠겨 약간 기울어진 도메니카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투구를 쓴 듯한 헤어스타일, 큰 눈 위에 짙은 갈매기 눈썹, 얼굴 윤곽선은 도메니카다. 도메니카의 자세, 드레스, 핑크색 스카프는 모두 오른쪽 커튼과 조화를 이룬다. 화가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모티프인 다리를 꼰 커다란 회색 개와 도메니카가 가져간 꽃다발을 배치했다.
도메니카는 기욤이 죽은 뒤, 연인 장 발터와 1941년에 재혼한다. 발터는 기욤의 컬렉션을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해 애를 썼다. 발터 사후, 1950년대 말에 도메니카는 이 컬렉션을 정부에 기증하였다. 도메니카는 이로서 첫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한 의혹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미술관에서 웬만하면 기증자에 대한 긍정적인 표현을 하는데, 드랭이 그린 초상화에 대한 해설만으로도 그녀의 악명을 가늠할 수 있다.
이후 도메니카가 죽고 7년 뒤, 1984년부터 오랑주리 미술관 지하 공간에는 폴 기욤과 장 발터의 컬렉션이 전시되고 있다. 예술은 예술의 존재로 삶에 대한 커다란 위로가 되고, 삶은 또한 삶으로서 예술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어쨌든 우리는 도메니카 덕분에 삶과 예술의 비정한 일면을 직시하게 되었다.
◇최금희 작가
최금희는 미술에 대한 열정과 지적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수차례 박물관대학을 수료하고, 서울대 고전인문학부 김현 교수에게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예술의 전당 미술 아카데미에서는 이현 선생에게서 르네상스 미술에 대하여, 대안연구공동체에서 노성두 미술사학자로부터 서양미술사를, 그리고 미셀 푸코를 전공한 철학박사 허경 선생에게서 1900년대 이후의 미술사를 사사했다. 그동안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통해 작가별로 그의 이력과 미술 사조, 동료 화가들, 그들의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 그리고 관련된 소설과 영화, 역사 건축을 바탕으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현재 서울시 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쿠키뉴스=홍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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