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차이로 같은 날 타계한 인접 고을 두 지사
[정만진 기자]
▲ 김사용 지사, <의열단의 국내 폭탄 반입 사건 보도>에 "경성에서 搬來된 폭탄은 김사용, 조황의 집에 맛겨"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1923년 4월 12일 동아일보, 경성지방법원 1919년 8월 30일 판결문 |
ⓒ 국가보훈부 |
지사는 26세이던 1909년 안희제·배천택·이시열·서상일 등 80여 동지들과 함께 신민회 계열 비밀결사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해 지하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와 격문들을 다수 인쇄 배포하는 등 적극 활동하다가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경성지방법원 1919년 8월 30일 판결문은 그의 '본적/주소'를 '경북 상주 인봉 11'로 공훈록과 약간 다르게 적어 놓았다.
지사는 1920년 2월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으로 구성된 신흥학우단(新興學友團)과 연락하면서 문상직·김춘배·서영균·송정덕·김용만·서상일 등 다수 동지들과 함께 김동삼이 만주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에서 보내 온 독립문서, 임시정부 강령, 선포문 등을 배포하고, 폭탄으로 일제의 주요 관공서를 파괴하며 친일 매국노들을 처단하려고 계획하다가 체포되었다.
1923년 3월 의열단(義烈團)의 김시현·황옥·유석현 등이 상해에서 폭탄을 반입해 일제 주요기관들을 폭파하려 할 때 폭탄 5개를 보관하는 등 적극 가담했다가 또 체포되었다. ('황옥 경부 폭탄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운동사에서 아로새겨져 있는 이 사건을 소설 형식으로 소개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경기도 경찰부 경부(현재의 경감) 황옥이 의열단과 첫 인연을 맺은 때는 1920년 9월이었다. 의열단의 (1920년) 제1차 암살 파괴 계획이 실패로 끝났을 때 대구 경찰서에 잡혀 있던 김시현을 서울로 압송한 경관이 바로 황옥이었다.
황옥은 이듬해인 1921년 4월 18일 광복회 재건 활동을 펼치고 있던 우재룡을 군산에서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했다. 그만큼 황옥은 조선인이면서도 36세에 불과한 나이에 경부까지 승진했을 정도로 일제의 신임을 받아온 인물이었다.
황옥은 1922년 1월 21일 이래 열사흘 동안 모스크바에서 극동(極東)인민대표대회, 즉 코민테른 국제대회가 열렸을 때 김시현에게 여비 50원을 제공했다. 그해 12월 김시현·유석현·김지섭·윤병구 등이 총독부 판사 백윤화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요구한 혐의로 지명 수배되어 있는 중에 황옥은 경찰 상부에 기묘한 신청서를 제출했다.
"(의열단 김상옥의) 종로 경찰서 투탄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중국 출장을 가려면 정보원이 있어야 합니다. 김시현과 유석현을 포섭해서 활용할까 합니다.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윽고 김시현과 유석현은 황옥과 함께 중국으로 들어갔다. 황옥은 두 사람과 나란히 김원봉을 만났다. 황옥은 그 자리에서 의열단에 가입했다.
그 무렵 의열단은 제2차 암살 파괴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5월경 장건상이 거사 계획을 발안하고, 김원봉과 함께 총지휘를 맡았다. 김시현이 행동대장 역을 맡았고, 조선일보 안동현 지국장인 홍종우가 연락 중계 및 폭탄 반입 요원을 맡았다.
권총 5정, 마자알·현계옥·이동화 등이 제조한 폭탄 36개, 전단 〈조선총독부 관공리에게〉 3,000매, 〈조선혁명선언〉 등을 압록강 너머로 옮기는 것이 마지막 과제였다. 이때 큰 도움을 준 사람이 황옥이었다.
황옥은 의도적으로 조선일보 안동지국을 개설하고 지국장으로 의열단원 홍종우를 앉혀 두었었다. 홍종우는,
"지국 문을 연 지 다섯 달이 지나 운영이 안정되었으므로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개설 축하연을 개최해야 예의범절을 지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너스레를 떨면서 신의주 경찰서 최두천 경부, 영사관 경비 경찰들 등 10여 명을 초청하였다. 연회에는 김시현 등 의열단원 10여 명과 신의주 기생 10여 명도 동석했다. 밤이 늦도록 마시고 노는 중에 황옥이 호기롭게 외쳤다.
"2차는 본인이 신의주에 가서 크게 한 턱을 쓰겠소!"
모두들 환호성을 지르면서 황옥의 제안에 반색을 표했다. 황옥이 거듭 강조했다.
"본인이 마련하는 자리인즉 한 분도 빠짐없이 신의주로 동행해주시기를 바라오. 불참하시는 분이 계시면 크게 섭섭할 것입니다."
최두천이 맞장구를 쳤다.
"경성에서 중국 본토까지 출장을 오신 황옥 경부가 마련하는 자리인 만큼 여부가 있겠습니까? 모두들 다 참석하실 겝니다. 여러분! 저의 말에 틀린 점이 있습니까?"
황옥이 인력거를 불러 최두천을 앞에 태운 뒤 출발을 명했다. 인력거 아래에는 폭탄과 권총을 넣은 트렁크들이 실렸다.
하지만 잘 진행되고 있는 듯 여겨지던 제2차 암살 파괴 계획은 며칠이 지나지 않아 일거에 붕괴되고 말았다. 3월 10일경 고성능 폭탄들은 서울까지 배달되었지만, 거사 관련자들은 3월 13일부터 체포되기 시작하여 김사용, 김시현, 남영득, 류병하, 류시태, 박기홍, 백영무, 유석현, 이경희, 조동근, 조황, 홍종우, 황옥 등 모두 18명이 일제 경찰에 붙잡히고 말았다.
▲ 권구하 지사, 1919년 4월 2일 경북 예천 만세시위 현장, 권석인 지사가 서울에서 들고 온 33인 독립선언서 |
ⓒ 국가보훈부 |
경북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에서 일어난 1919년 만세운동은 용문면 출신 권석인이 고종황제 인산에 참여해 서울 3·1운동을 목격하고 귀향한 데서 시작되었다. 독립선언문을 들고 돌아온 권석인은 권석호, 권세원, 권석효 등과 만나 3월 12일과 17일 예천읍 장날에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뜻을 모았다. 하지만 두 번 모두 일제 경찰의 감시에 걸려 부득이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권석인은 4월 2일(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 기준,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인명사전에는 4월 3일) 저녁 각 동네마다 연락을 보내어 주민들을 상금곡리에 모이도록 하였다. 이윽고 밤 10시(공훈록 기준, 인명사전에는 밤 9시)쯤 수백 명이 모였다. 권석인 등이 군중 앞에서 힘차게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군중들도 호응하여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군중은 면사무소 앞길을 따라 만세를 부르면서 시위행진을 하였다. 일본 군경이 출동해 총검으로 군중을 강제 해산시키고(인명사전에는 "금곡 헌병주재소에서 헌병이 출동해 발포"), 권구하 지사 등 주동 인물들을 체포했다. 권구하 지사는 1919년 5월 5일 예천 헌병분대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대를 맞았다.
덧붙이는 글 | 국가 인정 독립유공지가 1만8천여 분 계시는데, 국가보훈부와 독립기념관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는 1500년 이상 걸립니다. 한 달에 세 분씩 소개해도 500년 이상 골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날, 의거일 등을 중심으로 '오늘의 독립운동가'를 써서 지사님들을 부족하나마 현창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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