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단 공인 ‘배친자’… “김연경 파트너 키워 우승할 것”
‘연습은 없다. 오직 실전뿐. 승리를 위해 싸우자!’
‘한 번 포기하면 습관이 된다’
지난 10일 경기도 용인 흥국생명 연수원. 체육관에 들어서자마자 벽면에 붙은 짙은 분홍색 플래카드가 눈길을 끌었다. 마르첼로 아본단자(54) 흥국생명 감독이 직접 구단에 부탁해 붙인 문구라고 했다. 올해로 프로배구 V리그 3시즌째를 맞는 그가 팀에 와 바꾼 것들 가운데 하나다. 선수들이 수시로 볼 수 있는 자리에 낯선 한국어로 슬로건을 써 붙이며, 그는 간절하게 ‘변화’를 바랐다.
아본단자 감독은 일명 ‘배구에 미친 자’로 불린다. 고된 훈련 기간 중 단 하루 쉬는 날에도 ‘배구’라고 쓰인 옷을 입고 나타나 선수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넘치는 열정을 본인은 “이탈리아인이라서 그렇다”고 넘기지만 배구에 대한 진심만큼은 결코 가볍지 않다. 특히 ‘한국 배구의 발전’에 관해서라면 할 말이 많다. 아본단자 감독은 그간의 V리그 경험을 말하는 동안 시종 열을 토했다.
아본단자 감독은 1996년 이탈리아리그에서 지휘봉을 처음 잡은 후 내로라하는 유럽 클럽을 이끌었다. 불가리아, 캐나다, 그리스에선 국가대표팀 감독도 지냈다. 세계 무대에서도 ‘명장’으로 통하는 그가 한국에 온다고 했을 때 의외라는 시선이 많았던 이유다. 아본단자 감독은 “내가 가진 역량을 한국 선수들에게 쓰고 싶었다”며 “구단의 제안과 김연경의 설득이 있기도 했지만 ‘한국 배구에 기여하고 싶다’는 마음이 무엇보다 컸다”고 말했다.
한국에 와서는 ‘몰빵 배구’부터 바꾸려 했다. 공격수 전원이 고루 활약하는 배구가 가장 이상적이라지만, 그동안 V리그 무대에선 공격력이 강한 외국인 선수의 공격 점유율을 높여 점수를 올리는 게 승리 공식으로 통해왔다. 아본단자 감독은 “용병에 많이 의지하다 보면 선수의 마음가짐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며 “프로 선수로서 가져야 하는 멘탈리티를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여기서 ‘멘탈리티’란 단순히 선수의 ‘자기 관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코트 안팎을 아우르는 선수로서의 태도 자체다. 아본단자 감독이 팀에 와 훈련장 분위기를 바꾼 것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체육관에 네트를 하나 더 설치해 허투루 쓰는 공간이 없도록 하고, 시즌 중에도 비주전급 선수들의 성장을 병행해 경기에 나서지 않는 선수들에게도 책임감을 부여했다.
물론 변화는 더딘 법이었다. 아본단자 감독을 포함해 그간 많은 감독이 새로운 배구 철학을 입혀 야심 차게 시즌을 시작했으나 ‘몰빵 배구’와 작별하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하곤 했다. 장장 6개월간 쉴 틈 없이 시합을 치르는 리그 특성상 확실한 득점 루트를 확보한 팀이 앞서가는 양상이 반복됐고, 어느새 배구계엔 ‘한국 배구는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이 똬리를 틀었다.
“사실 해외 리그의 경우엔 최소한 10명에서 11명 정도의 벤치 멤버가 있어서 교체도 원활히 할 수 있고, 새로운 구성으로 다른 전략을 짜볼 수도 있는데 한국에선 그러기가 어려워요. 워낙 뎁스가 얇고 주전급 선수와 벤치 선수들의 실력 차이가 매우 커서 웬만하면 주전 선수에게 시즌이 끝날 때까지 모든 걸 맡겨야 하죠. 그러면 또 이 선수들은 힘에 부칠 수밖에 없고요.”
아본단자 감독은 변화를 가로막는 걸림돌로 ‘외국인 선수 트라이아웃 제도’와 ‘신인 선수 발굴’에 대한 제약을 꼽았다. 한국배구연맹은 2015-2016시즌을 기점으로 구단과 선수의 독자적인 접촉에 의한 자유계약제를 폐지하고 트라이아웃 제도를 도입했다. 이에 따라 V리그에 입성하기 원하는 선수들은 한자리에 모여 사흘간의 입단 테스트를 거쳐 구단의 지목을 받는다.
외국인 선수의 몸값 상한선이 무한정 높아지는 걸 막고자 도입된 제도지만, 아본단자 감독은 이로 인해 선택권은 오히려 좁아졌다고 지적했다. 그는 “팀이 원하는 만큼 전력 보강을 하는 데 도움을 주는 제도는 아니라고 본다”며 “팀에 정말 필요한 선수를 데려와야 하는데, 지명 순서에 따라 가능한 선수들을 고를 수밖에 없고 단기간에 선수의 기량을 파악하기도 어렵다”고 짚었다.
한국 배구계에 스민 고질적인 ‘저변 약화’ 문제도 넘기 어려운 벽이다. 아본단자 감독은 “유소년팀이 프로 구단 산하에서 크지 않는 한 큰 스텝을 밟아나가기 어려울 것 같다”며 “해외에는 유소년 선수와 성인 선수가 섞인 리그가 있어서 같이 겨루면서 성장할 수 있는데 한국은 프로리그와 실업리그, 고교리그가 전부 분리돼 있다”며 “이런 환경에선 신인 선수가 프로 무대에 와서 바로 출전 기회를 받기조차 어렵다”고 아쉬워했다.
그럼에도 아본단자 감독은 “벽이 많고 기대했던 만큼의 속도는 아니지만 서서히 변하고 있는 것 같다”고 평했다. 올 시즌 V리그에 늘어난 외국인 감독들의 존재감이 대표적인 변화다. 남자부의 경우 7팀 중 5팀의 사령탑 자리를 외국인 감독이 차지하며 면면이 대거 바뀌었다.
물론 가장 큰 변화의 열쇠는 선수가 쥐고 있다. 아본단자 감독은 “외국인 감독이 많이 들어온 건 긍정적이지만 사실 국내 선수의 변화가 팀에 미치는 영향력이 더 크다”며 “외국인 선수가 득점을 책임진다 해도 결국 팀 분위기는 현지 선수들이 이끌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현재 국가대표로 뛰고 있는 선수들이 소속팀에서 스타 플레이어는 아니라 아쉽기는 하다”고 말했다.
김연경이라는 큰 별을 품은 흥국생명이라고 ‘한국 배구의 발전’이라는 커다란 고민 앞에 자유로울 순 없다. 2022년 V리그에 복귀한 그가 여전한 기량을 자랑하고 있음에도 팀이 두 시즌 연속 우승 트로피를 놓친 것 역시 이런 문제들이 발목을 잡아서였다.
결국 김연경의 부담을 줄이는 게 우승을 위한 관건이다. 올 시즌 유독 선수단 구성에 변화가 많아 감독으로서는 고민이 더 깊어졌다. 흥국생명은 비시즌 기간 외국인 선수로 아포짓 투르쿠 부르주(튀르키예)를, 아시아쿼터 선수로는 미들블로커 황 루이레이(중국)를 데려왔다. 두 선수 모두 상위 지명 순서는 아니었지만 세터 이고은과 리베로 신연경을 트레이드로 영입해 아쉬움을 덜었다.
김연경과 공격 부담을 나눠 질 대각 자원들의 주전 경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아본단자 감독은 “이 포지션에 김미연, 최은지, 김다은, 정윤주 등 4명의 선수가 있는데 그간 전지훈련 및 연습 경기에선 정윤주를 주로 내보내긴 했지만 시즌이 시작되고도 주전 경쟁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결과를 장담하진 못해도 우승에 대한 욕심만큼은 여전하다. 아본단자 감독은 “감독이라면 누구나 우승을 하고 이기는 게 목표”라며 “현실적으로는 플레이오프 진출이 1차 목표지만 최종 목표는 당연히 우승”이라고 말했다.
용인=이누리 기자 nur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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