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재단 270억 마중물…예술과 과학이 충돌했다
지난 14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글렌데일의 공공도서관 브랜드 라이브러리. 이곳 아트센터 1층 전시장 바닥에 흙이 없는 풀밭이 조성됐다. 갈색 풀들은 땅에 뿌리를 내린 대신 작은 전자 기기에 몸을 의지하고 서 있었다.
“여러분, 이 풀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화성 탐사선 퍼시비런스 로버가 화성에서 수집해서 보낸 바람 데이터입니다. 화성에서 보낸 데이터를 지구에서 받기까지는 약 7~14분이 걸립니다.”
미 항공우주국(NASA) 제트추진연구소(JPL)에서 나온 연구원이 설명한다. 이 작품은 키네틱 아티스트 데이비드 보웬의 ‘풀밭’. NASA JPL의 과학자·엔지니어들과 예술가들의 협업으로 준비한 전시 ‘혼합된 세계:행성 간 상상의 실험’에서 선보인 10점의 작품 중 하나다.
이튿날인 15일, 미국 서부 최대 규모의 미술관 라크마(LACMA·LA 카운티 미술관)에선 ‘우리는 그림 속에 산다: 메소아메리칸 예술 속 자연의 색’이란 전시가 개막했다. 이 전시에선 전통 기법 염색을 주제로 한 멕시코계 미국 작가 포르피리오 구티에레스의 대규모 설치미술이 눈에 띄었다. 구티에레스는 ‘메소아메리칸 예술 다시 보기’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는 LA 미술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스타 작가 중 한 명이다. 라크마의 또 다른 전시장에선 현대 예술에 접목된 디지털 기술을 살펴보는 전시 ‘디지털 목격자’와 상대성 이론 등 과학 이론을 반영한 조시아 매켈러니의 조각 작품도 함께 전시되고 있다.
게티 재단의 지원으로 LA 일대와 샌디에이고까지 남부 캘리포니아 주요 미술관·박물관 등 70여 개 기관에서 5개월 간 이어지는 ‘PST 아트’가 15일 공식 개막했다. 일부 전시는 10일부터 문을 열었다. ‘예술과 과학의 충돌’이라는 주제 아래 과학과 예술의 렌즈로 우리의 미래를 탐구하는 대규모 미술 축제다. 이 행사엔 게티 재단이 약 270억원을 지원했으며, 각 기관이 5년에 걸쳐 준비했다. 전시에 참여한 아티스트만 800여 명이다. 남부 캘리포니아 전역이 거대한 실험실이자 전시장이 됐다.
PST 아트는 이번이 세 번째다. 2011~2012년 첫 행사에선 LA의 미술사를 짚었다. 이어 2017~ 2018년 행사에선 라틴 아메리카 예술의 맥락을 추적했다. PST는 ‘태평양 표준시간대(Pacific Standard Time)’란 뜻으로, 앞서 PST였던 행사 명칭을 예술 행사로서 정체성을 뚜렷하게 드러내기 위해 올해부터 PST 아트로 변경했다. PST 아트는 앞으로 5년 간격으로 계속 열릴 예정이다.
올해 주제인 ‘예술과 과학의 충돌’은 각 기관의 특성에 따라 다양한 콘텐트로 다채롭게 변주된다. 그리피스 천문대, 아카데미 뮤지엄,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버치 아쿠아리움, 자연사 박물관. 헌팅턴 라이브러리 보태니컬 가든도 이번 전시에 참여했다.
우선 이 행사를 주도한 게티 센터는 ‘루멘(Lumen): 빛의 예술과 과학’ ‘확대된 경이로움:18세기 현미경’ ‘추상화된 빛: 실험 사진’ 등의 전시를 개막하고, 헬렌 파시안과 찰스 로스의 설치 작품 2점을 선보였다. 기원전 800~1600년 빛의 과학이 중세의 예술과 종교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본 ‘루멘’ 전시엔 중세 시대 서적과 장식품 등 유물들이 대거 나왔다. 한국 작가들의 작품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LA 해머미술관 전시엔 국경 넘는 쓰레기를 소재로 작업해온 양쿠라와 제주 해녀를 주제로 작업한 리서치 밴드 ‘이끼바위쿠르르’의 작품이 전시됐다. ‘인디고의 예술과 과학’을 주제로 한 샌디에이고 밍게이 뮤지엄 전시엔 이영민, 크리스티나 킴, 사라 장의 작품이 출품됐다. 또 미디어 아티스트 서효정의 작품(아트센터 칼리지 오브 디자인), 한국계 청각 장애인 크리스틴 선 킴(샌디에이고 현대미술관)의 벽화도 눈에 띄었다.
행사는 내년 2월까지 이어지며 전시뿐만 아니라 콘서트부터 강연, 산책에 이르기까지 수백 개의 프로그램이 함께 열린다. 캐시 플레밍 게티 재단 회장 겸 CEO는 “PST 아트는 경계를 넘나드는 새로운 전시 모델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며 “70개 이상의 기관이 조화를 이루는 전시는 ‘창조와 협업의 도시’인 LA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로스앤젤레스=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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