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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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화 기자]
"어? 이거 엄마 전 냄새다. 엄마가 했어?"
추석 전날 오후, 시댁에서 음식 준비를 끝내고 쉬고 있는데 뒤늦게 도착한 아이들이 시골집으로 들어서면서 말했다. 남편과 나는 시댁에 먼저 내려가고, 각자의 일정으로 바쁜 아이들은 다음날 따로 버스를 타고 내려왔다.
그동안은 명절에 시어머니께서 전을 부칠 재료를 미리 준비해 놓으시면 나는 부치기만 했다. 이번에는 시어머니가 편찮으셔서 재료 준비부터 모든 걸 내가 맡아서 하게 되었다. 같은 음식이라도 요리하는 사람에 따라서 그 방식이 다르니 냄새만으로도 손이 달라진 걸 아이들이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 편찮으신 시어머니 대신에 처음으로 혼자서 명절 음식을 만들었다. |
ⓒ 심정화 |
게다가 연세가 많으셔서 그런지, 해가 갈수록 시어머니가 하시는 음식은 간도 맞지 않고 점점 맛이 없어져서 별로 먹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해주는 음식에 입맛이 길들여진 아이들도 할머니가 하신 음식은 잘 먹지 않았다. 음식을 준비하느라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식구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여러 모로 힘든 명절을 보냈다.
그래도 시어머니께서 해마다 해주시는 김장 김치는 맛있었다. 손이 크신 어머니는 김치를 유난히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서 해마다 겨우내 먹고도 남을 엄청난 양의 김치를 직접 담가서 보내주셨다. 그 덕분에 나는 감사하게도 28년 동안 김장의 수고를 모르고 살았다.
맛 없어진 시어머니 김장
몇 해 전부터는 어머니의 김치 맛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배추는 덜 절여지고 간도 맞지 않았다. 분명 김치에 들어간 재료는 똑같은데 맛은 점점 없어졌다. 그래도 연로하신 몸으로 자식들을 챙기시는 어머니의 정성을 생각해서 무조건 맛있다고 해드렸다. 그런데 작년에 보내주신 김장 김치는 너무 맛이 없어서 겨울내내 먹어 치우느라 곤혹스러웠다.
요즘들어 부쩍 아프다는 말을 자주 하시는 어머니께 힘드시니까 이제 그만 하시라고 아무리 말씀을 드려도 그저 인사말이라고만 생각하시는 눈치였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할 것 같았다. 더구나 이제 구순의 연세라서 무리해서 일을 하고 나면 앓아 누우시는데, 그 뒷감당이 더 부담스러워서 이번에는 솔직하게 말씀을 드렸다.
"어머니 음식이 이제 좀 맛이 없어요. 올해 김장부터는 그냥 제가 할게요."
몇 번을 벼르다가 어렵게 말을 꺼내고는 어머니의 눈치를 살폈다. 서운해 하시는 표정이 역력했다. 내가 하는 음식도 자꾸만 간이 짜져서 식구들이 타박을 한다고 장난스럽게 덧붙여 보았지만, 이미 어머니는 마음이 많이 상하신 것 같았다.
"늙으니 음식도 맛이 없어진다" 하시며 힘없이 돌아앉으시는데, 어머니의 굽은 등이 더 좁아 보였다. 매년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하셨던 말씀이 모두 빈말이었나 싶게, 평생을 지겹게 해오신 일에서 벗어나게 되었는데도 좋아하시기는커녕 서운하시기만 한 모양이었다.
어머니께서 그만하겠다고 먼저 말씀하실 때까지 기다렸어야 했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다른 명절 때와 다르게 남편과 아이들이 내가 요리한 전을 맛있게 먹고 있어서 더 눈치가 보였다. 어쩌면 며느리에게 곳간 열쇠를 넘기고 뒷방으로 물러나 앉은 시어머니의 기분을 느끼셨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마음이 불편했다.
▲ 한국의 겨울철 김장모습, 배추소금절임 |
ⓒ seiwa_ on Unsplash |
처음으로 혼자서 김장을 하려니 배추는 얼마나 오래 절여야 하는지, 양념 양은 얼마나 준비해야 하는지, 고춧가루나 마늘은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벌써부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인터넷으로 레시피를 찾아볼까도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어머니께 여쭤보는 게 나을 것 같다.
며느리에게 곳간 열쇠는 물려주셨지만, 열쇠를 물려받은 며느리가 곳간 안의 사정은 아직 잘 모른다는 사실을 아시면 마음이 좀 풀리시지 않을까? 더불어 그동안 고생하신 시어머니가 이제 좀 편하게 지내셨으면 하는 며느리의 진심을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브런치스토리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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