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본 경영에 감동한 세계적 나비학자의 헌정 [내 인생의 오브제]

2024. 9. 21.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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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故 박영주 이건산업 회장의 ‘이건나비’
故 박영주 이건산업 회장과 ‘듀도릭스 이건’ 나비.
부산 엑스포 유치전이 한창이던 지난해 일반인에게는 낯선 용어가 하나 등장했다. 태도국. 태평양도서국가의 약자로 태평양에 있는 섬나라들의 집합체다. 모두 14개국인데 우리나라와 사우디아라비아 간 이들 국가의 표 확보 경쟁이 치열했다. 결과는 신통치 않았던 것 같지만…. 이들 14개 국가 중 오스트레일리아의 북쪽, 파푸아뉴기니의 동쪽에 위치한 솔로몬제도라는 곳이 있다. 제도라는 이름이 붙은 건 크고 작은 섬들이 합쳐져서 그런 건데 무려 1000개 정도 된다. 총면적은 한반도의 7.7분의 1. 인구는 100만이 안 된다. 1942년 태평양전쟁 당시 미국 호주 연합군과 일본 간 치열한 전투(과달카날)가 벌어졌고 지금은 미국과 중국 간 첨예한 갈등이 빚어지는 곳이다. 그러나 자연은 이런 정치적 상황에 무심하다. 남태평양의 숨은 보석으로 알려질 정도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여행사 사무실에는 관광객을 유혹하는 홍보물이 즐비하다.

45년 전인 1980년부터 이곳 솔로몬제도에 진출해 사업을 벌이는 기업이 있는데 바로 이건산업이다. 이 회사 오너가 작년에 운명을 달리한 고(故) 박영주 회장. 1965년 광명목재에 입사한 그는 여러 차례 원목 파동을 겪으면서 원자재 확보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어떻게든지 원목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전 세계를 대상으로 가능한 지역을 물색한 결과 이곳 솔로몬의 밀림을 발견한다. 아주 오랜 기간을 거쳐 그는 원주민들의 마음을 샀다. 벌목 허가를 받았지만 나무를 자르지 않았다. 병원 지어 무료 서비스를 하고 학교 무료 교육했다. 그런 후에야 벌목을 시작했는데 그게 여의도 면적의 70배 달하는 뉴조지아섬의 숲이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장대비가 내리는 날이면 밤새 키가 2㎝씩 쑥쑥 자라는 유칼립투스 데그룹타 수림.

외환위기의 와중 이건의 경영 위기가 닥친 1997년이었다. 솔로몬에 특별한 손님이 찾아온다. 카누를 타고 정글을 누비던 영국 자연사박물관 소속의 나비학자 존 태넌 박사였다. 부상을 당한 그는 현지에 마땅한 의료시설이 없는지라 이건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고는 이건이 가꿔놓은 조림지에서 나비를 찾아 연구하고 싶다는 부탁을 한다. 박 회장이 기꺼이 그를 도왔다. 경치가 좋은 언덕에 손님용 숙소를 마련하고 모든 편의를 제공했다. 안내인을 붙이고 차량까지 제공했다.

47세의 늦은 나이에 영국 켄트 대학에 입학한 태넌 박사는 새로운 나비 종을 찾기 위해 사람들의 접근이 어려운 오지를 탐험하고 있었다. 구름층에 살다가 적란운이 비바람을 일으키고 나면 이후에 지상으로 내려오는 매우 희귀한 나비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누구도 그런 나비를 본 적은 없었다. 그 나비를 발견할 만한 최적지가 솔로몬이라고 믿었다. 6개월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태풍이 지나간 후 새벽에 조림지로 나간 그는 빨갛게 떠오르는 태양 빛을 받아 코발트색 날개를 팔락거리는 나비를 보게 된다. 바로 그가 찾던 나비였다.

그는 이건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박 회장에게 약속을 하나 했다. “내가 만약 그 나비를 찾으면 나비 이름에 이건을 넣겠다”고. 3년 뒤 약속을 지킨다. 2000년 말 열린 세계 나비 관련 학회에서 그 나비는 새로운 종으로 공인되었고, ‘Deudorix eagon(듀도릭스 이건)’이라는 학명이 부여됐다. 동식물의 학명은 일반적으로 발견 지역이나 관련 계보에 적합한 라틴어 이름을 붙이는 것이 관례지만 존 태넌 박사의 요청으로 기업 이름이 들어갔다. 세계 최초의 일이며 이 나비는 이건의 이름을 달고 영국 런던에 있는 자연사박물관에 영구히 보관돼 있다.

[손현덕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77호 (2024.09.25~2024.10.0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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