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버튼 누르는 순간 '스파이'는 볼 수 있다 [테크토크]
주파수 가로챈 감청은 전자전의 핵심
군용 통신 기술이 현대 IT 자양분 돼
최근 레바논 무장정파 '헤즈볼라'가 사용하던 무선호출기(삐삐)가 무더기로 터지면서 수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헤즈볼라는 이스라엘의 감청을 피하기 위해 휴대전화 대신 삐삐를 사용해 왔는데, 해당 제품 내부엔 사전에 폭발물이 설치돼 있던 겁니다.
삐삐, 휴대폰 등 무선전화기는 '전파'를 기반으로 작동합니다. 전파는 현대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 기술로 자리 잡은지 오래이지만, 안보 영역에선 양날의 칼입니다. 첨단 감청 장비로 무장한 스파이들은 사소한 통화 기록 한 줄까지도 포착해 위치를 추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폭탄으로 변신한 삐삐
미 일간지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은 지난 17일(현지시간) 미국 당국자 발언을 인용, 해당 삐삐 제품은 헤즈볼라가 수입한 대만산 전자 제품이라고 밝혔습니다. 다만 대만 제조업체 측도 헝가리 소재 기업에 외주를 맡겨 제조한 물품이라고 해명했습니다.
이스라엘 스파이들은 해당 삐삐의 제조 과정에 어떻게든 개입하는 데 성공한 듯합니다. 실제 이 삐삐의 배터리 옆에는 28~56g 수준의 폭발물과 원격 기폭용 스위치가 탑재됐었다고 합니다. 또 삐삐가 특정 주파수를 수신하면 수초간 신호음을 낸 뒤 자폭하도록 프로그래밍 됐습니다. 이로 인해 이날 수백 대의 삐삐가 동시다발적으로 폭발해 2000여명이 다치고 9명이 사망한 겁니다.
이스라엘 정보 당국은 헤즈볼라가 자국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텍스트 기반 통신 기기를 사용한 걸 역이용했습니다. 폭발물을 심은 삐삐가 헤즈볼라 단원들에게 지급된 뒤, 이후 이들이 사용하는 주파수를 알아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다가 가장 필요한 순간에 스위치를 누른 셈이죠. 그 효과는 상당했지만, 이번 사태는 글로벌 공급망의 투명성 문제와 정규군의 '부비트랩' 사용 등 다양한 경제적·윤리적 논란을 야기할 것으로 보입니다.
스마트폰 통화 단 한 줄도 피해 갈 수 없다
군사 작전에서 레이다(RADAR), 무선 통신 장비들만 노려 파괴하는 행위를 '전자전'이라고 합니다. 이런 장비 모두 전파를 기반으로 작동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로부터 통신은 군대 지휘의 중핵이었습니다. 만일 적군 무전기의 주파수를 알아내서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들을 수 있다면, 혹은 통신을 도중에 가로채 끊어버릴 수 있다면 전세는 확 기울겠지요.
심지어 미군, 영국군만 사용하는 정찰기인 'RC-135'의 경우 일반인이 사용하는 스마트폰 전파까지 낚아채 위치를 역추적할 수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파를 내뿜는 장비를 사용하는 순간 자기 위치를 적군에게 알리는 셈이 되는 겁니다. 이 때문에 미 공군의 RC-135 정찰기가 상공을 날 때마다 북한은 숨을 죽인다고 합니다.
강력한 전자전 장비 때문에 역설적으로 군대는 민간 통신 인프라를 사용하기 힘듭니다. 만일 정말로 전쟁이 벌어진다면 가장 먼저 네트워크 인프라부터 박살 날 테고, 스마트폰 같은 무선 통신 기기는 역추적·해킹 우려 때문에 사용할 수 없겠죠. 그래서 군인들은 최첨단 갤럭시, 아이폰을 놔두고 무거운 무전기를 사용합니다. 아군만 공유하는 주파수로 통신해야 스파이로부터 그나마 안전할 수 있으니까요.
군사 통신 기술, 현대 IT의 자양분 되다
아이러니하게도, 군사 통신 기술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IT 인프라의 자양분이 됐습니다. 일례로 현대 무선 통신 기기의 대표 격인 기업은 '퀄컴'입니다. 스마트폰에 탑재되는 5G 통신 모뎀을 납품하는 것으로 유명하지요. 이 모뎀에는 퀄컴이 디자인한 ARM 기반 스냅드래곤 칩과 다양한 안테나가 탑재됩니다.
그동안 안테나는 전파를 더욱 민감하게 감지하기 위해 발전을 거듭해 왔습니다. 특히 퀄컴 스냅드래곤 모뎀의 '혈맹'과 같은 기업들인 코보(Qorvo), 울프스피드 등이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지요. 이 기업들은 미 국방부와도 깊은 협력 관계를 맺고 있으며, 군사용 레이다나 무전기, 통신 시스템 개발의 중추이기도 합니다.
임주형 기자 skepped@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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