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평 감옥에서 광야 떠올린 이육사…화가들이 그렸다.
1904년 태어나 1944년 중국 베이징에서 옥사했다. 태어난 지 1년 만에 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은 일제에 외교권을 빼앗겼다. 순국한 이듬해 광복이 왔다. 40년 생은 한 번도 일제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짧은 세월 치른 옥고만 17번이다. 그러나 그의 시는 이 물리적 한계를 넘어선다. 독립운동가 이원록, 자신의 수감번호 '264'를 필명 삼은 이육사 얘기다.
하지만 그의 시를 독립투사의 저항시로만 한정을 짓기는 아쉽다. 근대 시인 중 이육사만큼 대륙적이고 스케일 큰 시를 쓴 이는 드물다. 그의 시는 시간으로는 하늘이 처음 열린 날부터 “천고의 뒤”까지 영겁 세월을, 공간으로는 북쪽 툰드라에서 광야를 오갔다.
이육사는 1943년 베이징의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시를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지독한 절망의 순간, 한 평 남짓한 감옥 방에서 드넓은 광야를 그리며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본 것이다. 비록 지금은 가난한 노래일지라도 긴 세월이 흐른 뒤 광야 찾은 초인이 목놓아 노래하리라 상상하면서.
화가 윤종구는 그 대목을 상상했다. 검푸른 허공은 무겁고 적막하지만 지평선 너머 아득히 “백마 타고 오는 초인” 같은 빛이 보인다. 김선두의 ‘절정’에는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북방으로 휩쓸려 온” 이육사가 있다. “서릿발 칼날 진” 고원 위에 선 인간은 작고 미약하며, 추운 이국땅에는 “한 발 제겨디딜 곳조차” 없지만 이육사는 눈 감고 무지개를 떠올린다.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내 교보아트스페이스에 가면 ‘읽는 그림’들을 볼 수 있다. 대산문화재단이 이육사 탄생 120주년을 맞아 기획한 ‘절정絶頂, 시인 이육사’ 시ㆍ그림 전이다. 김선두ㆍ노충현ㆍ박영근ㆍ윤영혜ㆍ윤종구 등 화가 8명이 이육사의 대표시 20편을 그린 24점이 걸렸다.
윤영혜는 ‘황혼’에 모진 고문과 투옥을 반복한 이육사의 심경을 담았다. ‘오월의 병상에서’라는 부제를 붙인 시 ‘황혼’에서 이육사는 자신처럼 아프고 병든 이를 염두에 둔 듯 “바다의 흰갈매기들 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자문하며 “의지할 가지 없는 그들의 심장이 얼마나 떨고 있을까” 걱정했다.
대산문화재단이 2006년부터 이어온 문학그림전이다. 한국 문학을 그림으로 표현한 전시로 ‘구보, 다시 청계천을 읽다’(2009),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2012ㆍ백석), ‘소월시 100년, 한국시 100년’(2020), ‘폐허에 폐허에 눈이 내릴까’(2021ㆍ김수영) 등이 호응을 얻었다.
전시는 29일까지, 무료.
광야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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