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어학회 참여, 시조연구 본격 나서

김삼웅 2024. 9. 20.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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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조문학의 큰별 가람 이병기평전 7]

[김삼웅 기자]

 '조선어학회' 사건을 겪은 당시 국어학자들 모습. 이들에 의해서 식민지 시기에도 한글은 명맥을 이어 발전했다.
ⓒ 자료사진
가람은 1930년 40세가 되었다. 1924년 장남 동희(東熙)에 이어 1929년 차남 경희(京熙), 1932년 3남 종희(宗熙)가 출생하여 가족이 늘어났다. 그의 일상은 1930년대에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조선어연구회의 사업에 열중하고 고전문학 연구와 시조탐구에 시간을 쪼개었다.

40세이던 1930년 11월 16일 주시경선생의 묘소를 참배하고 <주시경 선생의 무덤>을 지었다.

해마다 이곳에도 봄을 돌아오지 마는
벌린 모래 비알 풀 한잎 아니 나고
서글픈 개구리 소리 재를 넘어 들리오

한 손에 모래알을 움쳤다 뿌려도 보다
고개를 숙이고 잠자코 서서도 보다
발밑에 엉기어 드는 개미를 늘리오

해마다 봄은 와도 풀 한잎 아니 나고
표를 하며 세운 돌 한 개 있고 없고
남기어 주신 그 뜻을 맘 새겨 두리라. (주석 1)

11월 18일 한글발표기념식을 거행하고, 한글 철자법제정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연초에 열린 조선어연구회 총회에서 간사직을 사임했다. 연구와 강의가 많아 행정업무를 수행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무렵 조선에서는 1927년 1월 19일 신간회 창립, 5월 27일 근우회 창립,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 발발 등 민족운동이 전개되었다.

일제는 1931년 9월 이른바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중일전쟁을 도발했다. 이와 함께 국내의 식민통치가 더욱 극심해졌다. 1932년 10월 조선소작조정령을 실시하여 소작농민을 더욱 수탈하였다. 1931년(41세)과 1932년(42세)의 활동을 연보를 통해 살펴본다.

1931년 41세

1월 6일,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와 규칙 개정에 참여.
1월 24일, 한자어 제한위원회에 참석.
2월 14일, 조선어·한문교원회 결성.
5월 2일, 경성제대 고서전람회 참관.
7월 25일부터 약 1개월간 동아일보사 주최 한글강습회 연사로 전주·군산·순천·여수·목포·영광 등지를 순회 강연.
9월 30일~10월 1일, 휘문고보 3학년생 인솔 경주 수학여행.
10월 4일 경성제대 〈조선활자인쇄자료전〉관람.
10월 29일, 한글반포 485주년기념식에 참석.
12월 1일, 총독부에 납본한 휘문고보의 교지 <휘문>의 일부가 삭제 당함.

1932년 42세

5월 13일, 조선어·한문교원회에 참석.
5월 27일, 이은상의 <노산시조집> 출판기념회에 참석(청량사).
5월 31일, 〈조선미술전람회〉(경복궁) 참관.
7월 10일, 소설가 최학송 호상소에서 종일을 보냄. 발인은 7월 11일.
8월 5일, 전주 제1공립보통학교 한글강습회에서 3시간 강의.
10월 1일, 〈고서화 진장품(珍藏品) 전람회〉(동아일보사) 관람.
10월 7일~8일, 휘문고보 1학년생 인솔 개성 수학여행.
10월 29일, 한글기념식에서 '한글운동사'를 강연.
11월 25일, 휘문고보의 교지 <휘문> 제10호 발행금지 당함.
11월 26일부터 10일간 철자법위원회의 회의 참가. (주석 2)

가람이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보람을 느꼈던 조선어연구회는 1929년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을 추진했으나 총독부의 탄압으로 결실을 보지 못했다. 중일전쟁 이후 일제는 각급 학교에서 조선어 사용을 폐지하는 등 민족말살정책을 강화했다.

이에 대응하여 조선어연구회는 1931년 11월 4일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바꾸고 조직을 확대하여 1933년에는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발표한 데 이어 전국에서 광범위하게 국어 강습회를 열었다. 가람은 빠지지 않고 연사로 나가 우리말의 우수성을 역설하였다.

그는 바쁜 일상에서도 국문학과 시조에 관해 꾸준히 연구하였다. 1932년 동아일보에 <시조는 혁신하자>는 글을 연재했다. 이 글이 그의 시조와 관련한 첫 작품으로 '시조관'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앞 부분을 소개한다.

시조도 한 문학이다. 소설·희곡·동요·민요·신시와 같은 한 문학이다. 더구나 우리 조선에서는 역사와 그 의의가 깊은 한 문학이다. 고대 민요의 한 형식으로 발달되어, 적어도 근 천년 동안을 거쳐 오늘날까지 오는 것이며 우리의, 과거의 문학을 말하자면 과연 이 시조가 가장 소중한 것이다. 다른 가요보다도 또는 소설이나 기타 무엇보다도…….

그러나 시조는 다만 이러한 의미만이 아니라, 기정한 소시형(小詩形)으로도 가장 합리하게 되어있다. 엇시조·사설시조는 그만 두고 보통 쓰이는 평시조 하나만 가지고 말하더라도, 그것이 정형이라기보다도 한 정형으로서 대개 그 자수를 몇 자 이하, 몇 자 이상에서 암안이라도 취사할 수 있게 되었다. (주석 3)

그는 이 글에서 '시조를 혁신하자'고 제안한다. "여기에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시조의 혁신이다. 이미 말한 바에도 이러한 의미를 간간히 바쳐 왔지만 다시 그 혁신할 점은 따로 따로 들어 말하면" 이라 전제하고 다음 여섯 가지를 제시한다.

1. 실감실정을 표현하자.
2. 취재의 범위를 확장하자.
3. 용어의 수삼(數三).
4. 격조의 변화.
5. 연작을 쓰자.
6. 쓰는 법 읽는 법.
등이다. 이밖에 또 자수나 행수의 정형까지도 파괴하였으면 좋은 줄로 생각하는 이도 있으나 이는 아니된다. 시조로서의 목숨이 여기에 있고 이 목숨을 살리자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주석 4)

주석
1> <가람시선>, 31쪽.
2> <가람연보>, 앞의 책, 200~201쪽.
3> <가람문선>, 313쪽.
4> 앞의 책, 316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조문학의 큰별 가람 이병기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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