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격거' 결말이 자기변명? 당신이 놓친 메시지
[김성호 기자]
▲ 진격의 거인 스틸컷 |
ⓒ NHK |
<진격의 거인> 시리즈의 가치는 그저 인기 애니란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연간 7000억 원 내외의 매출을 올리는 일본 애니 블루레이·DVD 시장에서 매해 독보적인 인기를 구가했고, OTT서비스 유통과 해외 판권 판매, 피규어를 비롯한 상품과 각종 광고 등으로 막대한 수익을 창출했다.
만화 원작 또한 인기가 치솟아 전 세계 누적판매량 1억 부를 돌파한지 오래다. 그 수익만 5500억 원, 여기에 더해 실사영화까지 줄줄이 제작된다고 하니 그 효과를 짐작키 어렵다. 이미 원작자의 고향과 애니 제작사, 원작의 배경이 된 독일까지 관광객이 크게 늘었다 한다.
1기부터 4기, 그것도 3기와 4기는 방대한 분량과 세계관으로 인해 각 수가 둘로 나누어 편성돼 도합 8편의 작품이 TV 애니 <진격의 거인> 시리즈를 이룬다. 이중 대미를 장식한 4기는 'The Final Season' 파트 1, 2와 'The Final Season 완결편' 전편과 후편으로 나뉘었다. 이 모두 소위 질질 끌지 않고 완결성 있게 마무리하는, 요 근래 흔치 않은 엔딩을 보여줬다.
세계적 영향력 발휘한 일본 명작 애니
<진격의 거인> 4기는 3기로부터 3년이 흐른 뒤의 이야기다. 이제까지 동떨어진 파라디섬의 이야기를 다루었다면 점층적으로 존재를 알린 세계관을 본격적으로 드러내는 대륙 본토의 이야기가 풀려나간다.
특히나 인상적인 건 전환이다. 이제까지 주인공이었던 엘런 예거가 4기부터는 인류의 평화를 위협하는 악당으로 등장한다. 벽 안 세계를 거인들이 침공하고 그로부터 제 어머니가 눈앞에서 잡아먹히는 모습을 목격했던 그다. 거인에 대항하는 유일한 보루인 조사병단에 입단하고 스스로가 거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인류의 제일가는 병기로 활약해온 시간이 짧지 않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엘런은 벽 바깥에도 사람들이 사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동료라고 믿었던 라이너 등이 인류를 위협하는 거인이란 사실도 알아차린다. 그로부터 엘런을 중심으로 한 조사병단 동료들과 모종의 이유로 벽 안 세계를 공격하는 외부의 세력이 맞서는 이야기가 <진격의 거인>의 앞선 줄거리를 이룬다.
잃어버린 세계를 수복하는 데 많은 희생이 따른다. 동료의 시체를 넘어 마침내 저들이 놓인 섬 전체를 장악해낸 인류다. 그 너머엔 무엇이 있는가. 저들의 지난 고통을 초래한 또 다른 인류가 버티고 섰다. 지난 3년은 저간의 사정과 바다 너머에 사는 이들을 이해하는 시간이었을 테다.
▲ 진격의 거인 스틸컷 |
ⓒ NHK |
지난 3기까지의 이야기가 독자의 관점에선 완전한 판타지였다면, 4기는 제법 현실에 기반한 설득력 있는 이야기처럼 그려진다. 인간이 갑자기 거인이 되는 건 이쪽이나 저쪽이나 믿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에르디아인 중 선택받은 몇이 실제로 거인이 되니 파라디섬 안팎에서 거인과 인간의 싸움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마레 제국을 비롯한 대륙의 세계는 우리가 사는 세상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다. 과학기술이 발달해 자동차며 함선, 비행기가 개발되고, 이를 운용할 수 있는 에너지가 세계의 패권과 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 같은 발전속도라면 변신해 수미터에서 수십미터에 달하는 거인조차 극복하지 못하란 법이 없다. 거인이 세계 패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마레를 비롯한 대륙의 국가들이 파라디섬을 침공해 남아 있는 에르디아인까지 복속시키는 건 시간문제다. 가뜩이나 파라디섬엔 많은 천연자원까지 묻혀 있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는 터다. 이를 탐내는 대륙의 어느 나라가 따로 파라디섬의 에르디아인에게 접촉해 오는 일까지 있었으니 상황을 파악한 엘렌과 그를 따르는 에르디아인들이 저를 지키고 오랜 전쟁을 끝낼 계획을 세우기에 이른 것이다.
<진격의 거인> 4기는 파라디섬과 마레 제국의 전쟁을 그린다. 엘렌은 엘렌대로, 마레를 지키려는 이들은 그들 나름의 신념과 이상을 갖고 죽고 죽이는 전쟁을 치른다. 마레의 중심에서 테러를 일으키고 마레가 확보한 거인들을 제압하는 엘렌의 모습을 시작으로, 그가 섬 바깥으로 나와 거인이 아닌 인간에게 선제공격을 하게 된 이유까지를 제법 설득력 있게 비춰낸다.
▲ 진격의 거인 스틸컷 |
ⓒ NHK |
근간이 되는 것은 증오와 폭력의 사슬이다. 맞은 이상 칠 수밖에 없고, 맞지 않기 위해선 더 세게 쳐야만 한다는 논리가 국제사회를 지배한다. 폭력이 증오를 낳고 복수를 낳으며, 그는 그대로 거듭 반복된다. "싸움은 계속된다. 누군가 멈출 때까지" 하고 읊조리던 어느 캐릭터의 말처럼 역사 가운데 켜켜이 쌓인 사연들이 새로운 세대를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도록 묶어두는 것이다.
전쟁을 일으켰기에 고통 받아야 하고, 고통을 받았기에 복수해야 하며, 또 복수를 당했기에 보복해야 한다는 이야기들은 하나하나 가까이 다가서면 이해하고 납득할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처음 1기에선 누구나 공감할 밖에 없던 엘렌이 4기에선 더없이 잔인한 악당처럼 보이게 된다. 폭력의 사슬을 끊고 전쟁의 수레바퀴를 멈추는 일 또한 더없이 어렵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진격의 거인>이 보이고자 하는 바다.
처음엔 악마인 줄 알았던 거인이다. 인간과 다른 존재가 인간을 위협하므로 마땅히 처단하면 될 일이라 여겼다. 그러나 <진격의 거인>은 그와 같은 편한 시각을 얼마 유지하지 않는다. 거인이 아니라 인간이었고, 저항이 아니라 폭력임을 하나하나 일깨워간다. 악당이라 생각했던 이가 알고 보면 누군가에겐 더없이 아끼는 자식이자 믿고 의지하는 형일 수가 있음을, 우리의 영웅이라 믿었던 누구 또한 죄 없는 이들을 해하는 생각 없는 악마일 수 있다고 이 애니가 말하고 있다.
<진격의 거인> 시리즈가 그린 지옥도의 물감들을 하나하나 뜯어보자면 그 모두가 인류가 걸어온 길로부터 빌려온 것들이다. 두 차례 큰 전쟁과 여전히 근절치 못한 수많은 전쟁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그리고 어쩌면 일어날 수 있을 중국과 대만, 또 한반도의 불안들이 이와 얼마 떨어져 있지 않다.
▲ 진격의 거인 스틸컷 |
ⓒ NHK |
그러나 이 시대 전쟁이란 파라디섬과 마레의 역사가 그러하듯 켜켜이 쌓인 사연들과 뿌리 깊은 이기심, 자원과 에너지의 문제로부터 얼마 떨어져 있지 않다. 그 욕망과 원한이 모여 매 순간 역사를 이루니 그것이 <진격의 거인>이 그리는 괴물에게 먹힌 인간의 이야기와 얼마 다르지가 않다.
<진격의 거인> 시리즈의 결말을 누군가는 허황되고 자기변명적이라고 폄훼하기도 한다. 명백한 전범국의 후손이 전 세대의 죄책으로부터 받는 고통의 무리함을 논하는 것이 무책임하다는 비판엔 설득력이 없지 않다. 명백히 일제로부터 피해를 받은 국가며 사람들이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한 채 남아 있는 현실 가운데, 오늘의 일본이 환호하는 이야기가 이런 것이어선 안 된다는 시각은 차라리 자연스럽다.
그러나 <진격의 거인>은 오늘의 일본인만이 꺼낼 수 있는 담론이며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 주장이기도 하다. 그 시절 일본인이 악마였다면 이 시대 누구나 악마가 될 수 있다. 인간은 모두 욕망과 분노에 사로잡혀 괴물이 될 수 있는 존재다. 세상은 여전히 폭력과 부조리로 휩싸인 지옥 같은 공간이다. 그를 외면하고 평범한 행복을 좇는 시시한 인간들과 그를 적극 이용하는 못난 악당들이 있을 뿐이다.
▲ 진격의 거인 포스터 |
ⓒ NHK |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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