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서 습격 등 거사 도모한 안동농림 학생들
[정만진 기자]
▲ 안동농림학교(현 한국생명과학정보고등학교) '항일 기념비' |
ⓒ 국가보훈부 |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는 침략전쟁에 인력을 동원하기 위해 징병, 징용제를 실시하고 학생들에게 황민화교육을 강화하였다. 이에 안동 농림학교 학생들은 1944년 10월에 비밀리에 회합을 갖고 일본을 위해 개죽음을 당하느니 차라리 조국을 위해 떳떳이 목숨을 버리겠노라 다짐하고 '조선회복연구단'을 발족하였다.
'조선의 독립 쟁취', '신사참배 반대', '일제 식민지교육 반대' 등의 기본방침을 정하고 헌병대와 경찰서 기습 등의 적극적 대일투쟁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거사일을 앞두고 1945년 3월 1일 한국에서 추방당한 미국 선교사들이 두고 간 영문서적을 강순원, 현필기가 남몰래 가져와 간수했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단원 명부까지 압수되면서 조선회복연구단 단원 51명이 일경에 체포됨으로써 계획은 좌절되었다."
체포된 학생들 중 20여 명은 실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8월 15일 독립 이후 석방되었다. 2018년 발간 <안동농림학교 학생 항일운동>에 당시 생존지사 장병하 선생은 "해방된 뒤 경찰서에 가보니 우리를 취조하던 형사가 그대로 그 자리에 있고, 읍사무소나 어디를 가 봐도 그때 사무 보던 사람 역시 그 자리에 그대로 있고, 전부 친일파가 그대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어"라고 증언했다.
▲ 안동농림 '조선회복연구단' 단원들이 1945년 8월 18일 찍은 기념사진 |
ⓒ 국가보훈부 |
한국전쟁 발발 3개월째인 1950년 9월 20일 고제하(高濟夏) 지사가 타계했다. 1927년 2월 20일 안동에서 태어났으니 이제 겨우 23세에 불과했다. 전사 또는 피란 중 폭탄에 목숨을 잃은 횡사인가? 아니다. 일본제국주의로부터 혹독하게 당한 고문 후유증이 마침내 그를 저 세상을 데리고 가버렸다.
고 지사에 대한 추모의 마음으로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인명사전의 '고제하' 부분을 읽어본다. 미국 작가 엘모어 레너드(1925-2013)는 '글쓰기의 10가지 규칙'에서 "독자가 건너뛸 부분이라면 아예 쓰지 말라"고 주문했지만, 애국지사에 관한 해설을 성심껏 읽는 행동은 독립운동정신을 계승해야 하는 후대인의 당연한 도리이다.
"1927년 2월 20일 경상북도 안동군 안동면 율세동(현 안동시 북문동)에서 태어났다. 1940년 안동농림학교에 8회 입학생으로 입학하였다. 임과(林科) 재학 중 비밀결사 조선독립회복연구단에 참여하여 항일 활동을 전개하였다.
재학 당시 전시체제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군수물자를 지원하기 위한 근로봉사에 동원되는 일이 잦았다. 같은 학교 학생이 징병을 기피하다가 징계를 받거나 항공병으로 동원되기도 하였다. 군사 동원을 위한 비상조치로 수업연한도 단축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의 침략 전쟁에 희생되기보다 독립을 위해 활동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1943년 7월 여름방학 중 관솔 채취에 함께 동원되었던 권영동·서정인과 일본의 패전 전망 및 군사 동원이 확대될 것이라는 의견을 공유하고 항일 활동에 나서기로 뜻을 모았다. 1943년 가을부터 서정인의 집과 낙동강 제방 등에서 모임을 가지고 동지를 모았다. 자신의 집을 회합 장소로 제공하기도 하였다. 함께 모인 자리에서 조국의 상황에 대해 토론하고 독립을 위한 활동을 고민하였다.
더불어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 상황 및 태평양전쟁 전황 등 국외 정보를 청취하였다. 8회 입학생의 졸업이 1944년 12월로 예정되자 졸업 전 구체적인 활동 방안을 모색하고 조직을 만들자고 합의하였다. 1944년 10월 말에 8·9회 입학생을 중심으로 조직을 만들고 구체적인 행동 계획을 세웠다.
비밀결사의 명칭은 결성 초기 회복연구단 또는 조선회복연구단 등으로 불렀다. 후에 한국의 독립을 기필코 이루자는 의지와 청년이 독립 방책을 연구해 실행하자는 의미를 담아 조선독립회복연구단이라 명명하게 되었다.
안전을 위해 점조직으로 단원을 모집하였다. 조선독립회복연구단에는 50여 명의 안동농림학교 8·9·10회 입학생과 경주중학교 학생, 사회인 등이 참여하였다. 국내·외 정세에 대처하며 조직을 확대하다가 적당한 때에 무장봉기를 일으켜 국권을 회복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일제기관을 파괴하는 등 후방을 교란해 연합군의 상륙을 유리하게 한다는 계획이었다.
무장봉기 시에는 어두운 밤을 틈타 안동경찰서와 헌병파견대 무기고를 습격해 장악하고 교통·통신시설을 차단하고자 하였다. 봉기를 선동하는 벽보를 제작해 붙이고 확성기로 방송을 하는 등 일반인들을 무장봉기에 동참시킬 계획도 세웠다. 거사에 성공하면 일부는 의성 방면으로 이동해 대구에서 출동하는 일본군 부대와 교전을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1944년 12월에 안동농림학교를 졸업하였다. 무장봉기 날짜가 결정되면 졸업 후에도 동참하기로 하였다. 조선독립회복연구단은 1945년 2월 17일에 무장봉기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1945년 2월 초부터 고등계 형사의 사찰이 심해지며 단원 일부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에 거사 계획을 3월 10일로 연기하였으나 무장봉기 계획이 노출되었다. 경북도경과 안동경찰서가 연합해 단원들을 추적하였다. 3월 초에 단원 전체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였다.
1945년 3월 10일에 안동 전매지청(專賣支廳)에서 체포되어 대구감옥 안동분감(안동형무소)에 수용되었다. 심문을 받으며 재판을 기다리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직후 단원들과 함께 출옥하였다."
1943년 조선회복연구단을 결성해 안동경찰서와 헌병파견대 무기고를 습격할 계획을 세울 당시 고제하 지사는 겨우 16세였다. 열여섯밖에 안 된 어린 학생들이 그처럼 무시무시한 독립운동을 기획하였다니, 얼마나 놀랍고 또는 가슴 아픈 일인가!
무덤도 없는 독립지사, 호국원에 가묘 세워 모셔야 마땅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따르면, 고제하 지사는 "묘소가 재난 등에 의해 사라진 경우"에 해당된다. 전쟁이 한창일 때 세상을 떠난 탓에 제대로 묘를 조성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호국원에 가묘를 설치해야 마땅하다. 1950년 이후 74년째 방치만 하고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묘소가 안동에서 가까운 영천호국원에 조성되면 서둘러 참배를 가볼 일이다. 다만 아쉬운 바는 영천호국원 준공 기념비(2000.20.30.)가 반민족행위자 서정주의 시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이다.
나라를 지키고, 키우고, 늘리기 위해
목숨을 다해 애쓰시다가 가신 님들이여
푸른 하늘의 넋으로나마 우리 미래를 지키시노니
여기를 지나는 이 겨레의 남녀 노소들이여!
침묵 속에 울려오는 님들의 당부를
우리는 한순간도 잊어서는 아니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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