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혁의 한반도평화워치] 건강한 민주주의가 외교를 살린다
우크라이나와 중동의 화약고인 가자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서 가장 이득을 보고 있는 나라는 아마 중국이 아닐까 싶다. 전쟁이 장기간 지속하면서 중국과 패권 대결을 펼치고 있는 미국, 그리고 권위주의 국가 그룹의 경쟁국인 러시아의 국력이 소모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전쟁과 거리를 두고 있는 중국은 내심 이 두 전쟁이 장기화해 미국과 러시아의 체력이 최대한 약화하기를 바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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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2개의 전쟁에 국력 소모
중국, 개도국에 영향력 확대
한중일 협력해 동북아 안정을
정치 활용 말고 국익만 따져야
」
미국은 전쟁에 직접 참전하지는 않지만, 대규모 군사 원조를 끊을 수 없는 상황을 버거워하는 눈치다. 우크라이나를 향한 지원 문제가 미국 대선의 중요한 쟁점이 되고 있고, 무자비한 가자 공격을 고집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것은 미국의 국제적 이미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중국과의 경쟁에 집중해야 할 미국에 재정·정치·군사·외교적 부담이 되고 있는 것이다.
선거 민주주의 국가 크게 줄어
이와 달리 중국은 자신들의 체력을 비축하며 국제사회에서 영향력 확대에 나서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관계가 ‘브로맨스’로 불릴 만큼 중·러의 외형적 관계가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미국에 대항하는 ‘편의적 동행’의 성격이 강하다. 양국 사이에 깊은 불신과 경계심도 여전하다. 러시아와 4200㎞의 국경을 접한 중국이 연해주를 러시아에 뺏겨 동쪽 바다로 나가는 길이 차단되고, 미·소 냉전 기간에도 옛 소련과 끝없이 국경 갈등을 벌인 사례는 중국의 쓰라린 역사적 기억의 일부다.
결국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해 러시아가 경제적, 군사적, 도덕적으로 쇠락한다면 중·러의 격차는 더욱 벌어지게 되고 중국은 권위주의 국가 그룹의 독보적인 리더로 군림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실제 중국은 미국과 경쟁 속에서도 권위주의 확산을 위해 분주한 모습이다. 인류가 꿈꾸고 지향하는 궁극적인 가치가 자유민주주의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러나 선거 민주주의 국가와 국민의 수가 2016년 95개국 39억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지난해엔 91개국 23억명으로 오히려 줄었다는 통계는 먹고 사는 문제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중국은 이런 틈새를 활용해 경제 지원을 무기로 권위주의의 확산과 시장 확보에 끊임없이 나서고 있다. 아프리카나 동서남아시아, 중남미의 글로벌 사우스 국가(주로 남반구에 있는 신흥국과 개발도상국)들은 중국의 도로와 항만, 공항 등 대규모 인프라 제공을 반긴다. 이들 나라와 해상과 육상을 연결해 영향력을 확대하겠다는 중국의 일대일로(一带一路) 정책의 결과다. 시진핑 체제의 중국 경제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국제사회에서 영향권을 확대하려는 중국의 시도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오는 11월 미국의 대통령 선거 결과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목소리를 크게 하려는 중국과 이를 막으려는 미국의 견제에 따른 미·중 경쟁은 쉽사리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자유민주주의, 세계적 도전에 직면
이런 가운데 미국 중심의 서방 진영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이 서유럽 16개 나라에 제공한 대규모 원조인 마샬 플랜처럼 개발도상국에 대해 과감한 지원을 할 여력과 열정이 크게 줄어들었다. 정부와 민간 기업이 연계해 동남아 등 전략적 핵심 국가들에 진출을 시도하는 노력도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말 그대로 자유민주주의 질서가 세계적 도전에 직면하는 ‘위기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이런 자유민주주의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미국 등 서방 진영이 자유민주주의가 권위주의에 비해 자유와 인권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안정된 사회를 보장한다는 점을 증명해야 한다. 이를 위한 첫걸음은 정치적 분열과 비효율, 포퓰리즘 등 세계적으로 커지고 있는 민주주의의 비용을 줄이고 효율성을 높이는 데 힘을 쏟는 것이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은 단기간에 선진 경제와 민주주의를 달성해 ‘개도국의 롤모델’로 평가받고 있다. 그런 만큼 한국의 정치·경제적 발전 여부는 자유민주주의 진영 전체에 의미하는 바가 크다. 그런데 최근 한국의 성장 동력이 약화하고 있다는 경고음이 들린다. 무엇보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이라는 안보 위협은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있다. 안보 환경이 경제적 발전의 뒷다리를 잡고 있는 모양새다. 해결책은 외교를 통한 안정적인 환경을 확보하고 지속 발전의 토대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를 풀어나가는 방정식은 복잡하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에 직접 노출된 한국은 한·미 동맹과 한·미·일 협력을 강화하는 게 우선이다. 북한의 ‘뒷배’인 중국·러시아와 각을 세우는 건 현명하지 못하다. 핵을 가진 북한이 선(線)을 넘는 모험을 하지 않도록 유일하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나라가 중국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군사적 위기 조성에 따른 동북아의 혼란은 국제 사회에서 영향력 확대를 추구하는 중국 입장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한·중 간에 일종의 교집합이 있는 셈이다. 나아가 한·일의 협력도 북·중·러에 대항하는 대결 일변도가 아니라 유연한 대중 접근의 틀 속에서 미·중 관계가 악화하지 않게 하면서 진행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한·미·일 정상회의와 한·중·일 정상 회의를 정기적으로 열어 안보 현안을 논의하는 게 대안일 수 있다.
‘피크 코리아’ 자초하지 말아야
국가의 성장이 정체되면 급격한 쇠락의 길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한국이 일본을 거의 따라잡았다는 자만에 빠지지 말고, 위기를 맞고 있다는 점을 자각하면서 성장의 활로를 모색하지 않으면 쇠락의 시발점인 ‘피크 코리아(peak Korea)’를 자초하게 될 것이다. 국가의 안정을 담보하는 1차 요소는 경제발전이다. 국가가 가난해지면 민주주의냐 권위주의냐의 의미도 희미해지고,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감이 고조될 수 있다. 경제 성장을 담보하기 위해선 기업인들이 정치나 안보에 흔들리지 않는 환경을 조성하는 게 필수다. 세계 강국으로 둘러싸인 한국 입장에선 더욱 그렇다. 기업인들이 친미냐 친일이냐 친중이냐는 논란에서 벗어나 오로지 경제 활동에 전념토록 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정부와 정치의 몫이다. 또 안정적인 안보 환경 조성을 위해 외교에 국가의 역량을 집중하려면 정치적 이해득실과 포퓰리즘은 철저히 배제해야 한다. 건강한 민주주의만이 외교를 살리고, 지속적인 국가발전의 추동력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혁 전 베트남 대사·리셋 코리아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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