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신분 상승 40년 몸부림, 가혹한 신분제에 꺾여

2024. 9. 20.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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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양반 거부된 노비 이만강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영조 21년(1745년) 전 현감(縣監) 엄택주(嚴宅周)가 아비를 배반하고 임금을 속인 죄로 고발되었다. 영조 1년(1725년)에 실시된 문과 별시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엄택주는 내외직의 관직들을 거친 인물로 태백산에 들어가 수년째 향존 교육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런데 변성명(變姓名)에 개부역조(改父易祖)한 자라니, 그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과거 급제자들의 인적 정보가 실린 『국조문과방목』에 의하면 엄택주의 본관은 영월이고 아버지는 엄완, 조부는 엄효, 외조부는 신후종이다. 과거 응시용으로 제출된 이 기록을 보면 완벽한 양반인데, 이게 조작되었다는 말인가.

「 어미가 노비였으나 문재 뛰어나
10대 때 도망, 양반 엄택주로 위장

20년 공부 급제, 관료로 승승장구
죽기 10년 전 탄로나 흑산도 유배

조선 후기 신분 세탁 갈수록 늘어
기득권 세습 폐해 여전하지 않나

강원도 영월에 있는 충신 엄흥도의 정려각. 엄흥도는 세조에 의해 사약을 받아 죽은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묻어준 일이 뒤늦게 알려져 훗날 그 후손에게 벼슬이 내려졌다. 정려각은 충신·효자·열녀를 기리기 위해 지은 비각을 뜻한다. 노비 이만강은 엄흥도의 후손을 자처했다.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 규장각]

문과 급제와 함께 관직에 진출한 지 20년 만에 그를 둘러싼 비밀이 밝혀지기 시작한다. 『영조실록』, 『승정원일기』, 『동소만록』 등의 기록을 통해 엄택주 66년의 삶을 따라가 보자. 엄택주의 본명은 이만강(李萬江)이었다. 아비는 전의현(全義縣, 지금의 세종시) 관아 아전이고 어미는 사비(私婢)였다. 그 역시 관아의 심부름 일을 했는데, 신분은 종모법(從母法)에 따라 사노(私奴)로 분류되었다.

멸문 처자와 결혼하려다 실패
어려서부터 문재(文才)가 뛰어났던 이만강은 같은 고을의 신후삼(愼後三, 1683~1735년)에게 글을 배워 나이 16, 17세에 이르자 문예가 크게 진보했다. 이즈음 이만강은 노비의 신분으로는 나날이 성장하는 학문을 담을 수 없다는 문제 의식을 갖게 되면서 혼인을 통해 돌파구를 찾으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스승 신후삼에게 자신의 뜻을 밝히는데, “어느 고을에 의지할 데 없이 홀로 사는 아무개 가문의 처자가 있는데, 그와 결혼하고 싶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 집은 멸문의 화를 당해 모두 죽고 딸 하나만 남았는데, 과년토록 혼인을 못 하고 있었다. 신후삼은 고향이 같은 그 처자의 집안 내력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신후삼은 “어찌 네가 감히 그런 꿈을 꾸느냐”며 크게 화를 내고 “이제부터 내 집에 발을 들이지 말라”며 꾸짖었다. 비록 멸문의 화를 입었지만 양반은 양반인데, 노비 주제에 구혼장을 내려는 이만강이 방자하게 보였던 것이다. 참고로 이후 신후삼은 숙종 43년(1717년) 온양에서 치러진 정시(庭試)에 합격하여 문관의 길을 걷게 된다.

영월에 있는 엄흥도 묘.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 규장각]

스승에게 배척당한 이만강은 그 길로 고을을 떠나는데, 아전인 아버지와 모종의 협의가 있었을 것이다. 이만강이 도망한 시기를 놓고 『동소만록』은 16, 17세 때라고 하고, 『승정원일기』는 13, 14세 때라고 한다. 대과에 급제하여 역사 기록에 그 존재를 드러낸 것이 36세 때이니 언제 도망을 갔든 20년 이상의 세월을 홀로 고군분투한 것이다. 도망 노비 이만강은 강원도를 떠돌다가 영월 호장(戶長)의 딸과 혼인을 한다. 이곳에서 만강은 엄흥도(嚴興道)의 후손을 사칭하며 성명을 엄택주로 바꾸었다.

하고 많은 성씨 중에 이만강은 왜 엄씨를 선택했을까. 그가 조상으로 내건 15세기 사람 엄흥도는 동강 가에 버려진 노산군(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묻어 준 장본인이다. 세조가 보낸 사약으로 억울하게 죽은 어린 임금에게 인간적 예우를 다한 그는 후환을 피해 가족을 이끌고 먼 곳으로 숨어 버렸다. 그런 엄흥도의 일이 60년 만에 세상에 공식화되었고 다시 150년이 더 지난 현종 10년(1669년)에는 송시열의 발의로 엄흥도의 후손을 찾아 벼슬을 내리도록 했다. 문제는 엄흥도의 후손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송시열이 문인에게 보낸 1672년의 편지에 “그 자손을 찾아보니 대체로 있기는 있으나 참으로 그 자손인지가 분명하지 않아 마음에 꺼림칙하네”라고 한 것에서 당시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이만강이 엄택주로 변성명한 1705년(숙종 31년) 경은 엄흥도의 충절 정신이 한창 고조되던 시기였다.

영월 엄씨 엄택주로 족보 꾸며

영조 때 병조에서 엄흥도 후손에게 발급한 관문서. 군역과 잡역을 면제하는 내용이다.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 규장각]

이만강이 영월 엄씨 흥도의 지손(支孫)으로 신분 세탁을 한 것은 신분 상승을 꾀하던 공사천(公私賤)의 노비들이 흔히 쓰는 수법이었다. 조선 후기로 가면 지적(知的)·경제적 조건을 키운 비양반층의 활약이 팽창하는데, 돈으로 양반 족보를 사거나 후사가 끊긴 지손을 선택하여 갖다 붙이곤 했다. 자신을 가로막고 있던 사회적 장벽을 뛰어넘기 위한 노력이 양반 기득권을 해체하는 방향이 아닌, 모두가 다 양반이 되는 독특한 길을 걸은 것이다. 이만강의 경우도 영월 엄씨의 족보를 입수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과거 원서에 기입한 외조 신후종(申厚宗)은 평산 신씨 영월 입향조로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의 후손이자 의병장 신돌석의 7대조이다. 그의 딸 신씨가 엄효의 아들 엄완과 혼인한 것은 족보에 나와 있는 사실일 것이다. 다만 엄택주라는 아들은 어떻게 꾸몄는지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생사를 알 수 없던 잃어버린 아들 또는 혈친이 유교적 교양을 갖춘 근사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일 수도 있겠다.

엄택주가 된 이만강은 용문사(龍門寺)에서 독서로 10년 세월을 보내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데, 벼슬자리의 자제들과 교유하며 인맥을 넓혀간다. 권세가의 자제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들에게도 엄택주가 벗으로 삼을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엄택주는 1719년(숙종 45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그로부터 6년 후 영조 1년에 개설된 별시 대증광시(大增廣試)에서 44명 선발에 17위로 합격한다. 당시 그의 거주지는 강릉이었다. 그에게 대과 급제는 세상과 맞서 스스로 일궈낸 쾌거이자 인간 승리였다.

엄택주에 관한 기사가 보이는 『영조실록』.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 규장각]

엄택주는 책을 만드는 일을 하는 교서관에 배치되는데, 종9품 부정자(副正字)를 시작으로 계속 승진하여 3년 만에 정6품 전적(田籍)에 이르렀다. 글재주가 있는 사람이 맡는 제술관(製述官)을 겸한 것을 보면 문장에 능하고 학술적인 능력이 돋보였던 것 같다. 관직에 든 지 8년 차에 외직으로 나가는데 연서 찰방을 거쳐 경상도 영일(迎日 혹은 延日로 표기) 현감에 제수된다. 여기서 치적의 명성(治聲)을 얻는데, 살벌한 경쟁의 관료 사회에서 단기간에 훌륭한 평가를 얻었다는 것은 능력도 능력이지만 엄택주 내면의 다짐이 있었던 것 같다. 예컨대 경로를 확인할 순 없지만 변성명한 엄택주의 행적을 이미 알고 있었던 약헌 서종화(1700~1748)는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발설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중국 전국시대 진(秦)의 범수(范睢)를 떠올린다(『약헌유집』 8). 사지(死地)에서 살아남아 최고의 정치가로 변신한 범수(장록으로 개명)는 단지 한 끼 식사에 대한 은혜에도 반드시 보답했고 한번 노려본 원한에도 반드시 보복하였다고 한다.

엄택주는 영조 15년(1739년) 제주 판관을 거쳐 봉상시 판관을 끝으로 관직을 털어버리는데, 권력에 빌붙어 떨어질까 전전긍긍하는 족속들과는 다른 정신세계를 가진 것이다. 1745년 그의 과거가 탄로 나기 직전까지, 태백산에 은거하며 글을 읽고 후학을 양성하고 있었던 엄택주다.

윤리 저버린 죄로 다시 이만강으로

조선시대 전의현 지도. 지금의 세종시다.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 규장각]

정언(正言) 홍중효는 현감으로 있는 형을 만나러 전의(全義)에 들락거리다가 이만강의 도망 사실을 알게 된다. 족속들을 탐문하여 부모 형제가 서로 못 본 지 30년이 되었다는 사실을 입수한다. 이에 왕은 조정의 논의를 모아 엄택주의 죄목을 공표하였다. “엄택주의 일은 인간 윤리의 문제다. 왕도(王道)는 윤리를 제일로 삼는데 사람이 사람 노릇 하는 것은 오륜(五倫)이 있기 때문이다. 어찌 차마 모칭(冒稱, 성명을 거짓으로 꾸밈)하고, 그 조부(祖父)를 잊는단 말인가?” 엄택주에게 아비의 무덤에 성묘하지 않은 죄, 동생 이주영을 찾아보지 않은 죄를 물었다. “흑산도로 유배해 영원히 노비로 삼고, 대소과(大小科)의 방목(榜目)에서 그 이름을 삭제하라.”(영조 21년 5월 26일) 엄택주 아니 이만강의 나이 56세 때의 일이다. 다시 10년이 지난 영조 31년에 엄택주는 나주 괘서 사건에 휘말리며 흑산도에서 서울로 압송되었고, 물고(物故)를 당해 66년 그의 삶도 막을 내린다.

엄택주 그 개인의 삶은 막을 내렸지만,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신분의 굴레를 벗고자 하는 대중의 몸부림은 계속되었다. 살아서는 유학(幼學)이고 죽어서는 학생(學生)이 되는 꿈이었다. 몇 대조 선조 외에는 내세울 게 없는 양반층의 위기의식이 조상 추숭과 부계친족의 결속으로 방향을 틀었다면, 절대다수의 비양반층은 부의 축적과 같은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신분 세습의 고리를 끊어내고자 했다. 엄택주 등의 몸부림이 흘러간 과거의 일일 뿐인가. 종교·돈·학벌·인맥 등으로 똘똘 뭉친 이기적 집단이 지금도 우리 사회 곳곳에 가시덩굴을 치고 있지는 않은가.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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