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남자에게 빠진 부잣집 도련님, 섬뜩한 관계의 결말

안지훈 2024. 9. 19.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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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지훈의 뮤지컬 읽기] 실화 바탕 2인극, 뮤지컬 <쓰릴 미>

[안지훈 기자]

피아노 한 대와 배우 두 명으로 구성된 무대에서 섬뜩한 범죄를 둘러싼 이야기가 펼쳐진다. 1924년 미국 시카고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유괴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삼아 만들어진 뮤지컬 <쓰릴 미>. 이 실화는 <로프>라는 연극으로 만들어지기도 했고,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이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하는 등 다양한 창작물을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진 바 있다.

중소극장 공연인 뮤지컬 <쓰릴 미>는 크지 않은 규모임에도 탄탄한 스토리와 세밀한 심리 묘사 덕분에 두터운 관객층을 확보했다. 2007년 초연 이래로 류정한, 강필석 등 뮤지컬 스타들이 거쳐 갔고, 김무열, 지창욱, 강하늘 등 인기 배우를 배출하기도 했다. <쓰릴 미>는 올해로 13번째 시즌을 맞이했다.

<쓰릴 미>는 올해 부유한 집안과 뛰어난 지능을 가졌지만 '그'에게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나'를 정재환, 박상혁, 정지우가 맡았다. 이미 많은 것을 지녔지만 늘 새로운 자극을 추구하는 '그' 역은 황휘, 반정모, 장윤석이 캐스팅됐다. 공연은 오는 12월 1일까지 대학로 예스24스테이지 2관에서 이어진다.
 뮤지컬 <쓰릴 미> 공연사진
ⓒ (주)엠피앤컴퍼니
치열한 심리전을 보는 렌즈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캐릭터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나'와 '그'로 설명될 뿐이다. '나'와 '그'는 모두 사회에서 쉽게 충족할 수 없는 욕망을 추구하는 인물이다. '나'는 '그'에게 성적 매력을 느낀다. 그에게 사랑을 갈구하며, 그가 원하는 대로 맞춰준다. '그'는 철학자 니체의 초인론에 심취한 채 자신을 초인이라고 인식하며 우월감을 느낀다. 그리고 섬뜩하게도 범죄를 통해 자신의 우월감을 확인하려 한다.

동성을 향한 집착에 가까운 사랑, 그리고 범죄를 통한 우월감 추구. 둘은 각자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계약을 맺는다. '나'가 '그'의 범죄를 돕고, '그'는 '나'의 사랑을 채워준다는 계약이다. <쓰릴 미>는 이런 둘 간의 치열한 심리전을 그려낸다.

필자는 둘 간의 심리전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렌즈로 '사회 교환 이론'의 설명을 빌릴 것을 권한다. 미국의 사회학자 조지 호만스(George C. Homans)가 처음 제시한 이 이론은 사회적 상호작용을 행위자 간에 가치 있는 물질적·비물질적 보상을 주고받는 교환과정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개인은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지속하고, 보상이 클수록 상호작용의 빈도는 증가한다. 반대로 보상이 작거나 보상을 체감하지 못한다면, 상호작용의 빈도는 줄어든다.

'나'와 '그'의 거래도 그렇다. 둘은 서로의 만족을 위해 관계를 형성하고 상호작용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적게 주고 많이 받고 싶은 욕심은 부자연스러운 게 아니다. 둘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그'의 범죄를 돕는 것을 탐탁지 않아 하고, '그'는 '나'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는가. 뮤지컬에서 '나'와 '그'의 교환은 비대칭적이고, 관계 역시 비대칭적이다. '그'에게 모든 맞춰주는 '나'는 상대적으로 열세한 위치에 있고, 주도권은 '그'에게 있다.

<쓰릴 미>가 그려내는 치열한 심리전은 사회 교환을 두고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으로도 볼 수 있다. 열세했던 '나'는 특정 시점을 계기로 주도권을 넘겨받게 되고, 그렇게 새로운 비대칭적 관계가 수립된다.

이때 상징적인 대사가 '개자식'이다. 그동안 '그'가 자신을 이용한다고 느끼지만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느낀 '나'가 뱉었던 말이다. 그 대사를 어느 순간 '그'가 뱉는데, 이 상징적인 장면에 주목해 관람하기를 권한다.
 뮤지컬 <쓰릴 미> 공연사진
ⓒ (주)엠피앤컴퍼니
작품 속 캐릭터 톺아보기

니체의 초인론을 향한 지나친 심취가 '그'의 행위 동기였다. 그는 스스로 초인이라 생각했고, 초인은 우월해야 한다는 인식에 사로잡힌 탓에 범죄를 통해 자신의 우월성을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이는 니체의 초인론을 오독한 것이다.

니체가 초인의 존재를 긍정하고, 초인론을 주장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니체가 말한 초인은 기존의 도덕과 가치관에 얽매이지 않고, 주체성을 발휘하고 자기 자신을 극복해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인간이다. 기존 사회 질서의 모순을 발견하고, 새로운 질서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또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부수고 개조하는 과정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니체의 초인과 '그'가 되고자 했던 초인은 완전히 다른 존재다. '그'는 정작 초인의 중요한 조건인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지 못했다. 또 니체의 초인은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에 사로잡혀서도 안 되고, 타인을 경멸하거나 배척하는 존재가 아닌 데 반해 '그'는 자신의 우월성을 계속 확인하려 했다.

한편 스스로를 초인이라 자부한 '그'는 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허술한 측면이 많았다. 한 번씩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고, 결과적으로는 '나'의 계획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회보다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여겼지만, 자신의 범죄가 들켜 처벌받을까 걱정했다. 즉, 사회 제도의 작동을 두려워한 것이다.

강해 보이지만 실은 약했던 '그'와 대조적으로 '나'는 약해 보이지만 실은 강한 면모를 지닌 인물이다. 늘 '그'에게 휘말리는 듯하지만, 반대로 이용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또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나'의 회고는 욕망의 말로를 보여준다. 절제되지 않은 욕망 앞에 잘못을 깨달은 인간의 후회가 무력하다는 것을 상징하는 듯하다.

이렇게 욕망을 향한 집착이 두 남자를 어떤 결말로 이끄는지, 또 두 남자는 어떤 면에서 대조적인지 살펴보는 것 또한 <쓰릴 미>를 의미 있게 즐기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뮤지컬 <쓰릴 미> 공연사진
ⓒ (주)엠피앤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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