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리휴가 위해 싸운 부산 여성들, 30년 전 일입니다

김상목 2024. 9. 19.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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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마녀들의 카니발>

[김상목 기자]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자마자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 제목의 책이 떠올랐다. 다루는 범위나 배경은 차이가 있더라도 기본 취지나 주제의식이 닿아 있다. 책이 더 넓은 범위와 시간대라면, 영화는 부산 여성운동의 30여 년 시공간을 특정한다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어디선가 뚝 떨어진 양 치부되곤 하는 한국 페미니즘 운동에 역사성을 부여하고 흐름을 포착하는 도전이란 점에선 대동소이한 작업이다.

<마녀들의 카니발>은 그중에도 별로 조명될 기회가 없던 '지역' 여성운동 역사를 정리하려는 야심 찬 기획이다. 이제 일정 규모가 되는 도시에는 여성운동 단체나 관련 활동을 못 찾기가 더 어렵지만, 의외로 기록 작업은 잘 이뤄지지 않거나 내부 구성원 경험적 회고와 단순 자료수집에만 그치는 게 태반이다. 그런 실태를 고려한다면, 이 영화의 도전은 시도만으로도 특기할 만하다. 과연 부산 여성운동은 어떤 역사를 쌓아왔을까. 이제 그 비밀의 문이 열릴 차례다.

부산 여성운동의 시작
 '마녀들의 카니발' 스틸
ⓒ 씨네소파
'시조새'가 등장한다. 때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직후, '민주노조' 건설의 시대다. 수출 위주 제화공장이 밀집한 당시 부산, 경제성장 가운데에도 여전히 남자 형제들은 소 팔아 공부할 때 많은 여성이 학업 대신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장시간 노동과 열악한 처우 가운데 수천 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성차별과 폭력에도 노출되어 있었다. 그런 여공들을 지원하기 위해 상담과 교육, 문화 활동을 지원하는 노동 교실과 상담소가 탄생했다. 여기에서 생애 최초로 임금 계산법과 생리휴가 같은 기본권을 알게 된 여성들은 공장 내 만연한 차별에 맞서 활약을 펼친다.

10년이 흘렀다. 1990년대 후반 본격 여성운동 단체들이 지역에서 일련의 사건을 계기로 탄생한다. 가정폭력 피해자를 상담하고 구출하는 활동부터, 소송 지원과 여론 형성, 법제도 마련에 이르기까지 숙제는 넘쳐난다. 예전에는 반독재 민주화 운동 거대 주제에 하위 개념으로 치부되던 여성 의제가 수면 위로 등장한다. 장기간 폭행에 시달리다 남편을 살해한 정당방위 주장이 기각되고, 빚의 굴레를 통해 지역 사창가로 모여든 성매매 여성 대처가 쟁점화한다. 전문성을 갖춘 단체와 활동가 역할이 강조되기 시작한다.

밀레니엄의 2000년 전후로 화면이 바뀐다. 대학가 '영 페미니스트'가 조명된다. 총여학생회, 여성운동 매체와 학회가 주도한 일상의 정치적 투쟁이 광범위하게 벌어진다. 지역을 넘어 전국적으로 화제가 된 부산대학교 웹진 '월장'을 둘러싼 일련의 상황이 기억을 끄집어낸다. 당시 주류 학생운동 내에서 여성주의 의제가 대두하던 배경과 초창기 온갖 사건 사고가 차례로 소개된다. 현재 한국 사회 내 극심하게 논란인 남녀 대립 구도의 효시가 조명된다.

다시 10년이 지난다. 대학가에서 타올랐던 여성주의 흐름은 강남역 10번 출구 사건 같은 일련의 증오범죄를 계기로 과거 단체와 조직 중심 활동에서 비약적으로 활성화된 온라인 공간을 통해 새로운 물결을 형성한다. '영-영 페미니스트'의 대두다. 대학가에서 여성주의 운동이 재점화되는 것과 함께 무풍지대로 머물던 중고등학교 내 '스쿨 미투'라 불리는 청소년 여성주의 운동도 일어난다. 오랜만에 모여 추억을 회고하는 역사책 속 선구자부터 10대 청소년 활동가까지 지난 수십 년 동안 연결된 지역 여성운동 '계보'를 풀어내는 시간이 쏜살같이 흐른다.

지역 여성운동 연대기
 '마녀들의 카니발' 스틸
ⓒ 씨네소파
80분 남짓한 영화 시간 중 50여 분이 짧지 않은 지역 여성운동 연대기에 할애된다. 이 정리만으로도 <마녀들의 카니발>은 사료적 가치를 완수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분량은 어떤 내용을 채워냈을까.

중반 이후부터 영화는 시대도 분야도 제각각인 지역 여성운동을 통합적으로 선보이고자 한다. 일단 대학 공간에서 태동한 여성주의 활동은 선후배 만남과 꾸준한 교류, 그리고 이들이 지역 내 관련 단체와 활동에 진출하면서 주요 전환점이 된 사건들로 연결된다. 그리고 단체 토론회나 집회에서 원로 세대와 이제 갓 활동 개시한 신세대 간의 만남이 여러 차례 소개된다.

해당 부분은 세대 담론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지만, 그들의 '자매애'가 발현되기에 첨예한 대립보다 경청과 당부로 이어진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건도 변했고, 이제 활동 시작하는데 어렵게 여기까지 온 차세대에게 옛날과 비교하며 '좋았던 옛 시절' 대입하면 다들 달아난다는 하소연에 박장대소 공감하는 풍경이 훈훈하다.

하지만 연속성을 일정하게 확보한 대학 여성주의 활동 및 지역에서 꾸준히 활약하는 관련 단체 프로그램과 공동 대응 외의 분야는 파편적 나열에 머문다. 시작을 맡았던 여성 노동운동은 한참 뒤에 현재 대학 청소노동자 비정규직 철폐 투쟁으로 재현된다. 하지만 연결고리가 확연한 대학가와 단체 활동가들의 유대관계에 비해 여성 노동자들 활약은 그저 삽입된 영상에 가까운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친밀함이 전제된 전자와 비교하면 후자는 카메라의 간격이 확연하다. 태동기의 선배 활동가들과 현실 비정규직 환경미화 노동자들은 동년배이지만, 영화에서 이들이 교류하는 풍경은 딱히 설명되지 않는다. 그저 과거와 현재 단순 대입에 그친다. 여성 노동자들의 농성과 투쟁에 결합하는 모습은 당연히 등장하지만, 지역에서 일상적인 '품앗이' 연대 이상 해설의 부재는 아쉬운 대목이다.

1990년대 본격적으로 여성운동이 독자적 목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 다양한 분야에서 약진이 개시된다. 여성운동 중에도 상대적으로 더 열악한 여성 장애인 운동을 선도한 원로 활동가가 인터뷰에서 지적한 것처럼, '전체 운동' 내에서도 외면당하던 여성 장애인은 여성운동 내에서도 상대적으로 소외된다는 호소는, 영화 후반에서 별도로 호명될 기회를 얻지 못한다. 과거와 현재 교차가 작품의 가장 중요한 초점이란 측면에서 배려가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첨예한 쟁점을 우회하는 방법론
 '마녀들의 카니발' 스틸
ⓒ 씨네소파
물론 여성운동 영역은 이른바 전체 운동에서 분별 정립하는 과정처럼 단일 대오로 묶을 수도, 굳이 억지로 그래야 할 필요도 없다. 이런 본질은 여성운동 내에서도 수많은 다양한 입장과 갈래를 형성한다. 게다가 여전히 주요 현안에서 통일단결을 요구하는 함성에 묻힐 위험에 노출된다. 그런 첨예한 갈등과 쟁점에 대해 조금 더 논쟁적인 언급을 기대하는 이들이라면, <마녀들의 카니발>이 민감한 사안에 대해 견지하는 태도가 미적지근하다고 느낄 수 있겠다.

여성단체는 부산의 대표적인 사창가 성매매 문제를 주요 과제로 장기간 개입한다. 가부장제가 사창가 시스템에서 고스란히 구현됨을 지적하고, 빚을 짊어지게 해 착취를 유지하는 구조를 분석해 투쟁에 나선다. 하지만 지역 기득권층과 이곳의 유착관계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조밀하게 구축되어 있다. 오늘날도 여전한 지역 내 이권 연합체가 완월동에서도 강력하게 작동하기에, 소수 활동가와 작은 단체의 활약만으로 뒷짐 진 공권력을 움직이는 건 달걀로 바위 치기가 되고 만다.

하지만 충분히 예상했던 가부장제 카르텔에 또 다른 난제가 추가된다. 사창가의 '아빠'와 '엄마' (포주 역할), '이모' (호객 담당), '삼촌' (소위 '기도' 역할) 명칭처럼 유사 가부장제로 가동되는 시스템은 상황을 혼란하게 만드는 데 한몫한다. 집창촌 폐지 시위 맞은편에 기이한 유사 가족이 총동원된 반대 집회가 열린다. 기막힌 아이러니를 영화는 그저 보여주는 것으로 역할을 한정한다. 좀 더 평가나 소회 같은 게 가미되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공동 선거 대응으로 총력을 다했던 시장 선거 결과 당선된 '범민주 후보'가 성폭력을 저질러 불명예 퇴진과 구속에 이른 상황에 단호하게 항의하며 대응하지만, 대처하는 액션은 나와도 왜 운동진영 내에서 이런 문제가 반복되는가 고민을 풀지는 않는다. 알 만한 이들은 다 아는 문제일까. 하지만 지역 여성운동이 처한 고민을 표현하는 건 역사 나열보다 어쩌면 더 중요한 쟁점 아닐까. 이견이 나뉠 수밖에 없는 건이라 부담 갖는 건 당연하지만, 그래도 보다 명확히 다뤘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작품 속 내용 그대로
 '마녀들의 카니발' 스틸
ⓒ 씨네소파
개인적 소감을 언급하자면, 연작 형태로 주제를 구분했다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아마 작업 초반에는 별개의 장편영화 기획이 아닌 아카이브 정리 차원에서 비롯된 흔적이 엿보인다. ▲여성 노동의 과거와 현재 ▲대학에서 중고등학교로 연결되는 '스쿨 미투'의 확장성 ▲지역 내 통합 과제와 여성운동의 논쟁 역사 ▲여성 장애인 운동사 등으로 분별했다면 오히려 사료 겸 교육용으론 더 유용하지 않을까.

물론 상대적으로 조명받지 못해온 지역 여성운동 역사 정리는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누군가는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선발대로 길을 개척해야만 후속이 따를 수 있다. <마녀들의 카니발>은 화면에 꾹 눌러 담은 선대의 그림자를 부활하고, 현재의 활동가들에게 영감을 줄 귀한 자료들로 가득하다. 조금만 뒤늦게 대응했다면 영영 다시 찾아볼 수 없었을 기록들의 존재감이 대단하다. '온고지신'의 지혜를 얻고, 백래시의 혹한을 견딜 용기를 나눠주기 충분한 타임캡슐의 가치는 확실하다.

영화 속에 보관된, 각 세대를 상징하는 1988년 '부산근로여성의집', (영화의 제목으로 활용된) 2000년 부산대학교 페미니즘 축제 '마녀들의 카니발', 2016년 '부산성차별성폭력끝장행동' 등 부산에서 30여 년 동안 다양한 세대 여성운동을 당사자 목소리로 '한 큐'에 돌아볼 기회는 소중한 체험일 수밖에 없다. 이 영화를 계기로 흩어진 각 지역과 부문의 사회운동 연대기가 씨줄과 날줄처럼 곳곳에서 출몰하길 기대하며. 뭐든 시작이 중요한 법이니까.

<작품정보>

마녀들의 카니발
The Witches' Carnival
2022 한국 다큐멘터리
2024.09.25. 개봉 82분 26초 12세 관람가
감독 박지선
출연 홍점자, 손정은, 이미숙, 최명희, 이송희, 박영미
이재희, 장선화, 유영란, 장명숙, 장향숙, 이숙희
정경숙, 김정임, 이윤서, 박혜정, 임봉, 김효정(이코)
김희정(깡통), 변정희(똥종), 고윤정(팥쥐), 정영미(별리)
변현숙설래, 김재윤, 최예빈, 김이해, 정윤희, 세현, 가반
이기숙, 최수연, 석영미, 정현실, 최말자
제작 미디토리협동조합
배급 씨네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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