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현 목사의 복음과 삶] 살아있다는 것은
1519년 영국 정치가이자 학자인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라는 단어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낙원이라는 의미로 사용됐다. 파라다이스나 이상향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고통 없는 세상을 꿈꾼다. 현실은 낙원과 거리가 멀다.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다.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다. 고통의 문제는 최대 이슈다. 인간 존재 자체가 고통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곧 고통받고 있다는 뜻이다. 세상은 고해(苦海)와 같다. 고통보다 더 현실적인 것은 없다. 무통의 세상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이들은 운다. 아이만 우는 것이 아니라 산통을 겪는 엄마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성장통을 겪으며 자란다. 행복할 것만 같은 신혼생활에도 고통은 서려 있다. 행복 안에 고통이 함께 동거하고 있는 셈이다. 고통은 우리 주변을 늘 배회하다 예고 없이 밀고 들어오는 불청객이다. 소리를 지를 만큼 아프게 하는 것도 있고, 어떤 것은 소리조차 지를 수 없는 아픔도 있다. 잠시 왔다 지나가는 고통이 있는가 하면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도 있다.
고통의 종류는 사람 숫자만큼 다양하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은 유명하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고통이 너무 크면 실어증 환자처럼 할 말을 잊는다. 고통의 순간에 질문들이 쏟아지지만 확실한 답은 얻기 어렵다. 고통의 문제는 단답형이 아니다. 고통은 난해하기 그지없다. 고통의 이유를 알 수 없을 때 던지는 질문은 공허해진다.
고통은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빛깔을 띠는 복잡한 형태의 다면체다. 짓누르는 고통의 무게를 정확히 가늠할 수 있는 측정기는 없다. 고통을 다루는 기술은 아직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다. 고통은 고통이다. 고통을 피하려고 하다 보면 또 다른 고통이 다가온다. 고통이 삶의 언저리에서 떠나가는 순간 기뻐하지만 잠시뿐, 금세 또 다른 불안이 밀려온다.
원인 모를 고통은 먼 곳에 있지 않다. 고통 속에서 기적을 기다려보지만 기적은 사람들이 바라는 만큼 흔하게 일어나지 않는다. 고통이 깊어지면 절대고독에 빠진다. 고통을 가중시키는 것은 고립감이다. 내가 겪는 고통은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사람들에게는 위로가 필요하지만 기대하는 만큼의 위로는 어디서도 얻을 수 없다. 기대가 빗나가면 슬픔은 깊어지고 슬픔은 분노로 바뀌기도 한다. 어설픈 위로는 더 깊은 절망에 떨어지게 만든다.
고통보다 더 힘든 것은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다. 희망하는 것이 사라져 갈 때 죽음이 가까이에서 어른거린다. 고통의 쓴잔은 가슴의 따뜻한 체온을 빼앗아간다. 그럼에도 고통에는 신비가 있다. 고통은 고통으로 끝나지 않는다. 행복 안에 고통이 있듯 고통 안에 축복이 내재해 있다. 고통 저편에서 비쳐오는 희망의 불빛이 있다. 삶을 할퀴고 지나간 자리에서 피는 꽃이 있다.
고통은 시간 속에서 뜻하지 않는 형태로 변형된다. 고통에 시달리다 보면 멀리 보는 눈을 잃어버린다. 잃어버린 시력의 복원이 필요하다. 고통의 순간에 흔한 질문은 ‘하나님,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이다. 깊은 침묵이 흐르고 난 다음, 고통의 극점에서 십자가의 예수를 만난다. 믿음은 고통의 끝에서 만난 희망을 보게 한다. 십자가의 예수에게는 화려한 수식어가 없다. 경박스러운 언어의 유희와도 거리가 멀다.
하나님은 고통을 없애 버리는 기적보다 스스로 고통의 잔을 들이켜는 편을 선택하셨다. 예수는 무통이 아니라 고통의 극점에 다가가심으로 새로운 길을 여셨다. 고통은 어디론가 우리를 이끌어 들인다. 고통을 통해 얻는 최대 수확은 십자가다. 십자가는 고통의 유일한 해독제다. 고통이 십자가의 프리즘을 통과하면 세상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비경이 열린다. 고통은 파괴가 아니라 창조로 바뀐다. 고통의 바닥에서 천국의 소리가 들려온다. 신비다. 산다는 것은 신비다. 고통도 신비다. 십자가를 통과한 이후 열리는 부활의 아침은 찬란하다.
이규현 부산 수영로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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