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메이커 아소, 작전 짤 것"…'앙숙' 스가 득세하자 급해졌다 [줌인도쿄]
사실상 일본의 차기 총리를 결정하는 자민당 총재 선거(오는 27일)를 앞두고 장외 열전이 뜨겁다. 역대 최대인 총 9명의 후보가 난립한 상황에서 ‘킹메이커’를 자임하는 스가 요시히데(菅義偉·75) 전 총리와 아소 다로(麻生太郎·83) 자민당 부총재가 물밑에서 격돌하는 양상이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 사망 후 당내 최대 실력자로 부상한 두 사람이 ‘그림자 주인공’이란 말이 돌 만큼 이번 선거전에 사활을 걸고 있다. 파벌 해체 문제 등을 두고 사사건건 충돌하면서 오랜 기간 정치적 라이벌 관계였던 두 전직 총리의 선택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스가의 '1분' 지원 유세
스가 전 총리는 지난 8일 오후 가나가와(神奈川)현 요코하마(横浜)시의 관광지인 JR 사쿠라기초(桜木町)역 앞 광장에서 마이크를 잡고 이렇게 말했다. 고이즈미 전 환경상의 출마 선언 이틀 뒤였다.
스가는 ‘결착(決着)’이란 고이즈미의 선거 슬로건이 적힌 유세차에 올라 지지 의사를 처음 공개 표명했다. 한여름 땡볕에도 불구하고 이날 유세엔 7000여명의 군중이 모였다.
스가는 자신과 같은 가나가와현을 지역구로 두고 있는 고이즈미의 정치적 후견인으로 평가받는다. 평소 고이즈미가 무계파로 일관해 온 점과 정치 개혁 의지 등을 높이 샀다는 후문이다.
두 사람 간의 신뢰는 매우 두텁다. 고이즈미는 2019년 방송인 다키가와 크리스텔(滝川クリステル)과 결혼했다. 당시 고이즈미는 다키가와와 함께 총리 관저를 방문해 관방장관이던 스가에게 먼저 정식으로 결혼을 알렸다. 아베 총리보다 앞순위였던 셈이다.
다른 일화도 있다. 2021년 총리 재임 당시 지지율 하락에 시달리던 스가가 총재선 재출마를 놓고 고심할 때, 고이즈미는 나흘 연속 총리 관저를 찾아갔다. 결국 스가는 불출마 선언을 했는데, 당일 고이즈미는 기자들에게 자신이 스가에게 ‘명예로운 퇴진’을 권했다고 밝히면서 “(그간 나눴던 말들이) 많이 생각난다”며 눈물을 흘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당시 총재선에서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후보가 당선되면서 스가와 고이즈미는 비주류파의 길을 걸었다. 기시다 총리의 불출마 선언과 함께 3년 만에 열린 이번 총재선에서 스가의 절치부심이 돋보이는 배경이다. 특히 고이즈미를 총재로 추천한 20명의 의원 명단에선 스가의 의지가 묻어 난다. 특정 계파에 소속하지 않은 무파벌 의원이 14명이나 되는데, 이 중 10명이 스가와 가깝다. 이미 온라인에선 ‘고이즈미의 뒤에 늘 스가가 있다’는 뜻으로 ‘스가지로’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스가의 지원엔 부담도 있다. 스가가 전면에 나서면 참신한 이미지를 강조하는 고이즈미의 선거 운동에 지장을 줄 수 있어서다. 이 때문인지 지난 8일 스가는 1분 만에 연설을 마무리하고 유세차에서 내렸다. 통상 전직 총리 같은 거물급 인사가 지지 연설을 할 경우 수십분간 진행하는 것을 고려하면 파격적인 모습이었다.
스가는 요즘 주로 전화로 국회의원들에게 고이즈미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고 한다. 최근 기시다 총리의 최측근인 기하라 세이지(木原誠二·54) 의원이 고이즈미 지원에 나선 것을 두고도 ‘스가 배후설’이 나온다.
'파벌 유지' 아소는 고노 지지
하지만 각종 여론조사에서 고노의 지지율은 4~6%대에 그치고 있다. 이시바 시게루(石破茂·67) 전 간사장과 스가가 미는 고이즈미가 20%대 지지율을 보이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자민당 총재선에선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없으면 상위 2명이 결선 투표에 진출하는데, 현재로선 고노의 결선 진출이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
'견원지간' 스가와 아소
후쿠오카(福岡)현의 광산 재벌가에서 태어난 아소는 '황족(일본 왕족)'과 친인척 관계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 클레이 사격 국가대표로 뛰었고, 기업을 경영하는 등 경력도 화려하다.
반면 아키타(秋田)현의 딸기 농가에서 태어난 스가는 도쿄에서 대학(호세이대 법학부 정치학과)을 다니며 박스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 고학한 자수성가형 인물이다. 요코하마 시의원을 거쳐 중앙정치에 진출한 비세습 정치인이기도 하다.
아베 정권 당시 각각 부총리, 관방장관이었던 아소와 스가는 아베에게 종종 상반된 의견을 냈다. 기시다 정권 들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정치자금 스캔들 이후 두 사람은 나란히 자민당의 ‘정치쇄신본부’ 최고 고문이 됐지만, 파벌 문제를 놓고는 정면으로 충돌했다. 아소는 “파벌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친 반면, 스가는 “해체해야 한다”고 맞섰다.
아소의 선택은?
결국 차기 총리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두 거물의 희비도 엇갈릴 수밖에 없다. 현재로선 외견상 아소의 입지가 상대적으로 어려워 보인다.
아소 입장에선 스가가 미는 고이즈미는 물론, 당원을 포함해 세간의 지지율이 높은 이시바 전 간사장을 밀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아소는 ‘반경 2m의 남자’로 불릴 정도로 친화력이 뛰어나지만,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 홀로 열심히 정책을 연구하는 ‘정책통’인 이시바와 ‘궁합’은 그리 좋지 않은 편이다.
아소와 이시바는 구원(舊怨)도 있다. 2009년 아소가 총리 재임 당시 농림수산상이었던 이시바가 총리 퇴진을 요구한 게 발단이었다. 아소는 퇴진 대신 중의원 해산과 총선을 택했다. 결국 자민당은 선거에 대패하고 민주당에 정권을 내줬다.
아소 입장에선 9명의 후보 중 이시바와 고이즈미가 결선투표에 오르는 상황이 ‘최악의 시나리오’나 다름 없다. 그래서 일본 정계에선 후보별 추천 의원 명단 등을 근거로 “아소가 다양한 작전을 짜고 있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실제로 아소파 의원들은 이시바와 하야시 요시마사(林芳正·63) 관방장관을 제외한 나머지 후보 7명 모두에게 추천인으로 나섰다. 당선 가능성이 있는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63) 경제안보상에겐 의원 2명이 추천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최근 여론조사에선 보수층의 강력한 지지를 얻고 있는 다카이치가 급부상하는 가운데 고이즈미는 다소 주춤한 상황이다. 일본 정치권 안팎에서 “아소가 어떤 식으로든 이번 선거에서 킹메이커 역할을 하려 할 것”이란 관측이 계속 나온다.
도쿄=오누키 도모코 특파원 onuki.tomok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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